“실패라 생각한 순간 기회가 왔다!”

지독한 성장통이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이규혁 선수는 스스로를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4년 뒤 그는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또다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엔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실패=좌절’이라는 공식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 선수는 무려 6번의 ‘실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대중은 그런 그에게 비난 대신 찬사를 보냈다. ‘6번의 실패’는 다시 말해 ‘무려 6번이나 좌절을 딛고 도전’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BOOK WE ATTEND] 이규혁 선수의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
“4년 전 은퇴했다면 어쩔 뻔 했나. 이렇게 큰 사랑을 받으며 화려하게 은퇴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냥 비운의 노메달 선수로 올림픽을 떠났을 게 아닌가. 내가 올림픽에서 더 배울 게 있을까 싶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지난 2013년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이규혁 선수가 네이버에 연재했던 ‘소치노트’의 일부다. 올림픽 출전만 6번. 하지만 메달은 없다. 세계선수권 등 여러 경기에서 수차례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그이지만 올림픽에서만큼은 지독하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4년을 매일같이 메달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온 시간들이 허무하게 끝나 버린 순간의 좌절감을 어찌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단 올림픽 출전 선수들만이 겪는 아픔은 아니다. 지금도 시장이라는 험난한 경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직장인들, 남들보다 앞선 혁신을 이루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최고경영자(CEO)들. 우리 모두의 ‘좌절’과 똑 닮아 있다.

그가 최근 4년간의 성장기를 담아 책 한 권으로 풀어냈다.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전하고 싶은 진심은 무엇일까.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책에 잘 담아냈더라고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감사합니다. 아직도 저는 인생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에 그저 ‘잘 읽었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민망하면서도 뭉클하게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사실 책을 출판하는 건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일이었습니다. 4년 전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도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 군데 출판사에서 책과 관련한 제의가 들어오곤 했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심적으로 준비가 덜 돼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 땐 행운이 따라 준 덕분에 다시 올림픽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고, 그 덕분인지 훨씬 여유 있게 여러 일들을 즐길 수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속사나 지인들이 여러 일들을 추천해 주셨는데, 책 출간도 그중 하나였죠.”


스케이트를 처음 신었을 때부터 은퇴까지 그간의 과정이나 감정이 꽤 자세히 묘사돼 있던데요. 특히 4년 전 여섯 번째 올림픽 출전을 결심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모든 선수들이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4년을 매일같이 ‘올림픽 메달’만을 목표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하더라고요. 당시엔 그와 같은 심리적 변화를 저 스스로 감당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이미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이나 여러 가지 체력적 조건을 고려해야 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됐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위해 ‘조금만 더 운동선수 생활을 계속하자’고 굳게 결심했죠. 그렇게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전에 나가게 됐고 정정당당한 과정을 거쳐 대표선수로 발탁이 된 겁니다. 사실 주변에서는 ‘후배 선수의 자리를 뺏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선수의 자리를 뺏지 않았잖아요. 후배 선수들과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얻은 자격이고, 저 또한 후배 선수들이 저 대신 대표선수 자리에 갔다면 그 친구를 축하해 줬을 테니까요.”


여섯 번 도전했는데 일곱 번째 도전을 못할 것도 없지 않나요.
“물론 할 수 있죠. 지금도 선발전을 뛴다면 제가 1등은 못 해도 대표선수 선발권 안에 들어갈 것 같거든요. 사실은 4년 전처럼 또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어질까 봐 지난 4월에 벅적지근하게 은퇴식을 치른 겁니다. 돌이켜보자면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와 소치 동계올림픽 때 저는 모두 ‘은퇴’를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는 ‘그동안 올림픽에서 못 다 이룬 꿈을 이번에 모두 다 갚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그만큼 다른 사람의 기대도 높았고, 저 역시도 메달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겁니다. 그런데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전혀 달랐어요. 최연소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시절부터 그렇게 여러 차례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개막식이나 폐막식을 감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소치 동계올림픽 땐 처음으로 개막식 공연을 마음 편하게 즐겼던 것 같아요. 아마 메달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주변의 다른 것들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겠죠. 어떻게 보자면 소치 올림픽이 있기까지 지난 4년의 시간은, 저에겐 치유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해요. 도전의 과정에서 나이 어린 선수들과 경쟁하고 저 자신과 싸우느라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만큼 어느 때보다 저 자신과 솔직하게 대화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메달 없이도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미련 없이 은퇴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메달’보다도 더 소중한 ‘저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었으니까요.”


이 책을 보면 ‘지난 4년 동안 하고 싶은 얘기들이 참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보면 제가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싶다든가 하는 욕심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직까지 누군가에게 인생의 경험을 말하기엔 저 역시도 나이가 어리잖아요. 다만 저는 운동을 오랫동안 해 왔잖아요. 운동하는 후배들이라든지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제 이야기가 응원과 격려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 역시도 많은 분들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운동하는 내내 많은 힘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이 과정에서 스스로 느낀 점이 크긴 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 가다 보니, 특히 4년 전과 지금의 제 모습이 많이 비교가 됐어요. ‘그땐 좋지 않은 결과로 인해 이렇게 많이 힘들었는데,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이 만족스럽다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이런 깨달음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분위기로는 대중들 사이에서도 ‘노메달=실패’라는 공식이 많이 깨진 것 같은데요.
“물론이죠. 우선 저부터도 올림픽 메달 하나 없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는 게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처럼 메달이 없는 선수까지도 그저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 ‘응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도 뿌듯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점입니다. 혹시나 메달권에서 멀어진 후배 선수들에게 제가 그 선례가 돼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올림픽 출전 선수들의 부담감은 상상 이상입니다. 이런 부담감으로 인해 평소 잘하다가도 당일 컨디션이 안 좋다면 누구든 실수할 수 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도 후배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올림픽이라는 목표가 사라진 이후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찾으셨나요.
“굳이 인생에 있어서 구체적인 목표를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저야 어차피 스케이트 선수고, 은퇴를 했어도 스케이트와 관련된 일을 할 거예요. 코치든 스포츠기관의 행정관료든, 혹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든, 국제심판이든, 이후에 제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리에 서게 될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지금 저의 이 모든 경험들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갖춘 한국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미 그 길로 가기 위한 준비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전 같으면 지금 이맘때가 슬슬 운동 시작하고 몸만들기 시작하던 때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문득 ‘아, 나 이제 더 이상 운동을 안 나가도 되는구나’라는 걸 실감할 때가 있어요. 아마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지겠죠. 그래서 요즘은 하루하루를 더 바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도 많이 시작하고요. 지금 한창 석사 논문을 쓰느라 바쁜데 이것도 조금 더 여유 있게 할 수 있었지만 좀 서둘렀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면 순간적으로 슬퍼질 수도 있으니까. 얼마 전부터는 KBS TV 예능 프로그램 ‘우리동네 예체능’에 새롭게 투입이 돼서 축구를 배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머지않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으로 부모님과 함께 이사하는데 근처에 피트니스센터를 오픈할 계획도 준비 중이고요.”
[BOOK WE ATTEND] 이규혁 선수의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
‘영향력 있는 한국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스포츠 행정이나 코치 등과 관련해서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요. 제 장점은 국가대표 선수로서 누구보다 오랜 경험이 있다는 거죠. 저는 평소에도 ‘후배들이 운동하기 좋은 환경’을 위해 우리나라 체육기관의 행정이나 코치로 올림픽 국가대표 출신들이 더 많이 진출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현실적으로도 더 많은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에게 이 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사실 운동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주위에서 지원해 주는 행정이나 훈련 등 모든 부분이 다 연결돼 있잖아요. 그런데 국가대표를 해 본 사람들이 아무래도 경험이 많고 선수의 입장을 더욱 잘 헤아릴 수 있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국제경기에서 선수로 뛰어 왔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선수가 국제경기에서 불이익을 당할 때 우리 어른들의 대처가 소극적이어서 제대로 지켜주지 못 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컸어요. 재미있는 건, 실제로 경기 중에 자국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오거나 하면 큰소리를 지르면서 강하게 따지는 국가들은 대부분 강대국이에요. 그래서 제가 어린 후배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쌈닭’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이미 국제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의 수준을 갖추고 있는데, 어른들이 주위에서 이것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 친구들이 메달에서 실패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어요. 이런 어린 선수들을 제대로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은 거죠.”


오랫동안 국가대표 생활을 해서인지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한 것 같아요.
“그럼요. 앞서 말씀드렸던 피트니스센터가 후배들이 보다 운동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인 피트니스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에요.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들이 보다 자유롭게 모여서 새로운 운동법 같은 걸 연구하기도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거든요. 저는 뼛속까지 스케이팅 선수잖아요. 그런 만큼 많은 분들이 스피드 스케이팅에 대한 매력을 알아주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죠. 이를 위해 앞으로도 더 많이 노력하고 연구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