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 경방 사장의 ‘The Classic’ 6th
비유하건대 교향곡, 콘체르토 등의 클래식 음악이 나무라면 오페라는 숲이다. 나무와 그 밖의 자연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완전체를 이룬 숲이라니, 그 영향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는지. 극적 스토리와 오케스트라의 음악,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악기인 목소리가 더해진 오페라는 그 감동의 차원이 다르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종합무대예술.’ 오페라의 사전적 정의다. 분명 맞는 말인데 왜 이리 부족하게만 느껴질까. 그건 아마도 이 건조한 표현 뒤에 숨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의 아쉬움일 게다. 물론 필자도 처음엔 오페라에 대해 사전적 정의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음악과 극이 합쳐진 무대, 그것도 스토리로만 보자면 고상함과 거리가 먼 통속적인 삼류. 그랬으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클래식 입문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이미 고백한 바 있지만, 오페라에 대한 생각이 180도 달라진 것 또한 그 시작이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한 장르가 바로 오페라였다. 미국 켄터키 주 베리어대에서 수학할 당시, 화학 전공자였던 아버지가 음대생들과 함께 오페라 공연을 하며 ‘라 트라비아타’의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 역을 맡을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가 오페라에 열광하게 된 데는 시기적인 영향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기 미국은 음악과 예술,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찬란한 황금기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전설적인 연주자들과 지휘자, 가수들이 거쳐 가는 ‘코스’였으니 눈앞에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현혹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법도 하다. 아버지 입장에선 오히려 필자처럼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아버지는 아쉬워했다. 뉴욕에 가서 직접 무대를 봐야 한다고, 그러면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라고.
스토리와 음악의 완벽한 조화가 만들어 내는 가치
그 말이 맞았다. 미국 유학 당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경험한 필자는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버지의 얘기’로만 듣고 상상했던 오페라의 장면 장면을 현실로 목격한 순간의 감동은 레코드를 들으며 음악으로만 접했던 오페라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하이라이트만 골라 들었던 필자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악보를 펴놓고 전곡을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됐으니, 과연 오페라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가 극명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 길이 남을 전설들의 무대를 일상처럼 접할 수 있었던 아버지와는 분명 시대적으로 누릴 수 있는 차원이 달랐으니, 지금 이 얘기를 아버지가 했더라면 깊이감이 달랐으리란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지휘자를 논하며, 베토벤과 브람스를 이야기하며 감동 세례를 늘어놓았던 필자가 감히 말하건대 오페라는 감동으로 치면 가장 정점에 있는 장르다. 연극과 음악, 오케스트라 편성, 그리고 지휘자에 이르기까지 오페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가 좋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 하나는 보컬 뮤직이라는 점에서 그 감동의 수준이 다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는 목소리 아니던가. 그 목소리들이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어우러져 이뤄 낸 하모니가 오페라이니 차원이 다를 수밖에.
오페라가 대표적인 종합예술이지만, 개인적으로 굳이 비교해 보자면 스토리보다 음악에 더 점수를 주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앞서 말했듯 오페라의 스토리는 대부분 삼류인 경우가 많은데, 그 저속하고 때론 속물적인 이야기를 아름답게 포장해 주는 역할을 음악이 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페라 작곡가들에게는 곡의 기본이 되는 대본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종종 작곡가들 간에 대본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오페라의 대가인 푸치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푸치니는 아베 프레보의 소설 ‘마농 레스코’를 원작으로 한 오페라 ‘마농 레스코’로 일약 오페라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으나, 당시 J. F. 마스네와 원작을 차지하기 위해 속고 속이는 싸움을 하다 결국 원수가 되기까지 했다. J. F. 마스네가 만든 오페라 ‘마농’은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와 같은 스토리, 다른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유명하다.
음악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스토리와 음악이 조화롭지 않은 오페라에서 감동을 느끼기란 어렵다. 연기와 음악, 둘 다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야 하는 오페라 가수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들 중에도 이 두 장르의 조합을 최상으로 갖춘 이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례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가수지만, 연기력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가수라 불리며 마리아 칼라스와 함께 소프라노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레나타 테발디도 연기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소프라노이기도 했던 레나타 테발디는 푸치니 오페라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목소리라는 인정과 함께 역사적으로 그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단 비운의 여자 주인공이 많은 오페라 극의 특성상 건장한 체격이 몰입에 방해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래와 연기 두 가지 모두 완벽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필자가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마리아 칼라스가 왜 그토록 유명한 거냐고.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마리아 칼라스의 무대를 보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그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내뿜는 카리스마는 말로 설명이 안 된다고. 그리스 태생인 마리아 칼라스는 원래 체격이 좋은 편이었지만, 비운의 오페라 여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혹독하게 체중을 감량했다고 한다. 이후 성량에 문제가 생겨 피나는 노력을 했다니 과연 세기를 넘어 ‘오페라의 여신’이라 불릴 만하다. 레나타 테발디를 가장 좋아했던 아버지 역시 마리아 칼라스의 공연만큼은 돈을 빌려서라도 스탠딩이 아닌 앞자리 좌석을 구해 봤을 정도라니 감동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오페라를 듣지 말고 봐야 하는 이유
오페라 하면 베르디나 푸치니를 먼저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더 좋아한다. 감히 비교 평가하자면, 베르디나 푸치니의 오페라는 몇 개의 중요한 배역과 오케스트라 반주만 훌륭해도 전체를 끌어가는 데 무리가 없지만, 모차르트 오페라는 모든 배역의 하모니와 앙상블이 좋아야 비로소 완성된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경우 대가들의 연주가 많은 건 그런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나 베르디와 푸치니는 여전히 오페라 입문에 있어 정석과도 같다. 초연부터 인기를 누린 곡들이 많을뿐더러 걸작도 워낙 많다. 그뿐만 아니라 스토리와 음악의 혼연일체라는 오페라의 특성상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가 강조돼 초보자들이 몰입하기엔 더없이 훌륭하다. 특히 오페라의 대부분이 비극으로 클라이맥스에서는 그 슬픔이 절정에 달해 시쳇말로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오페라 ‘팔스타프’를 제외하고 전곡이 비극이었던 베르디는 비극을 표현하는 데 가히 천재적이었다. 여기에는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20대 중반 무렵 두 아이와 아내를 잃는 등 불행했던 인생사가 작용하는 듯 보인다.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는 초기작인 ‘나부코’와 ‘춘희’로도 알려졌으며 베르디 작품 중 가장 많이 공연되는 ‘라 트라비아타’ 외에도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등은 반드시 경험해 봐야 할 명작 중 명작이다. 토스카니니가 초연을 많이 했던 푸치니의 곡 중에서는 ‘라 보엠’과 ‘투란도트’를 꼭 감상해 보시길. 어떤 작품이건 공통적인 한 가지는 반드시 무대를 통한 감상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오페라는 듣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에 오페라 전용 극장이 많지 않다는 건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 국립 오페라하우스,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하우스 등 1년 내내 상시적으로 오페라 공연을 하는 극장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해 기회도 많아지고 수준이 좋아졌다는 건 분명 긍정적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지금껏 글로 오페라를 배웠다면, 이제 현장으로 가보시길.
정리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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