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업체 D옥션 회장 정연석
남 도산대로를 지나다 보면 특이한 건물을 만난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누드빌딩이란 애칭을 가진 엠포리아 빌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 국내 건축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왔다.우선 이 빌딩은 이웃 건물과 담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자작나무와 왕대나무를 심었다. 건물 중간 중간에 나무가 있어 삭막한 도심 속에서 잠깐의 여유를 찾게 해준다. 내부 인테리어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것을 기본 테마로 삼고 설계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90도가량 꺾여 있다. 에스컬레이터는 직선으로만 돼 있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외벽 창문의 사이즈도 제각각이다.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창문 하나까지도 손으로 직접 짜 맞춘 듯한 분위기가 난다. 각층마다 전망이 가장 좋은 오른쪽에 화장실을 배치한 것도 특징이다. 여기에는 ‘디자인이란 기존의 기능을 좀 더 편리하게 개선하는 것’이라는 D옥션 정연석 회장의 디자인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정 회장은 이력이 다양하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정 회장은 1987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5년간 해외 마케팅과 해외 전시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그는 인테리어 회사와 해외 명품 가구 수입 회사인 디오리지날 가구를 설립했으며 최근에는 미술 시장의 저변 확대를 위해 D(디오리지날)옥션을 설립했다.“저보고 주위에서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디자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이템만을 인테리어에서 가구, 가구에서 소품 등으로 바꿨을 뿐이죠. 전혀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것이 발명이라면 디자인은 기존에 있던 것을 더욱 편리하게 만드는 게 차이죠. 그런 면에서 디자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비즈니스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시장(마켓)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오는 9월 4일 첫 경매를 실시하는 D옥션은 공급 확대를 통해 왜곡된 국내 미술 시장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나갈 예정이며 특히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개해 국내 미술 시장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생각이다.서울옥션과 K옥션 등 메이저 경매 회사와의 경쟁에 대해 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의 자신감은 오랜 기간 쌓은 내공(미술 감각)에서 비롯된다. 정 회장은 D옥션을 설립하기 전까지 국내 대표적인 미술 컬렉터로 활동했다.“처음으로 미술품을 구입한 것이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린 김원 화백 개인전에서 풍경화를 80만 원 주고 샀던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등록금이 10만 원이었으니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은 150여 점 정도를 보관하게 됐네요.”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미술품 구입에 관심을 가진 덕에 상당한 심미안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지금이라도 미술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심미안을 쌓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이번에 열리는 첫 경매에는 르누아르, 샤갈, 피카소, 로댕을 비롯해 국내 대표적 작가들의 작품 200여 점이 출품될 예정이다. 이번 경매에서 나오는 작품은 그가 소장해 온 것들은 물론 지난 8개월간 100억 원을 들여 세계 유수의 미술 경매시장에서 수입한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미술품 경매를 위해 엠포리아 빌딩도 새롭게 단장한다. 공연장으로 운영하던 지하 1, 2층에 1000여 석 정도의 경매장을 마련할 계획이며 빌딩 최상층인 15층과 16층에는 기존 구조물들을 걷어내고 국내 최초의 자연 채광 갤러리를 만들 생각이다. 이를 위해 16층의 지붕을 유리 돔으로 꾸몄다. 또 16층 밑바닥을 개폐식으로 만들어 15층에 10m 이상의 작품도 내걸 계획이다. 1~4층에는 독일·일본 업체 3곳과 국내 업체 5곳 등 총 8개 업체가 입점한 미술 전문 백화점 아트 애비뉴가 들어선다.그는 최근 미술 시장의 저변 확대 요인을 ‘주거 공간의 변화’에서 찾았다.“우리는 전통적으로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민족입니다. 그동안 먹고사는 데 몰두하다 보니 이를 등한시했던 것뿐이죠. 지금 미술 시장의 호황은 전 세계 공통된 모습입니다. 저는 이 현상의 원인을 부동산 호황에서 찾고 싶습니다. 주거 공간이 점점 업그레이드되면서 그림을 놓을 공간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자연적으로 수요가 늘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작가들은 가격이 거품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전반적인 시장 여건은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정 회장에게 D옥션은 단순히 미술품을 사고파는 2차 시장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D옥션을 시작으로 국내 미술 시장의 체질 개선에도 앞장선다는 계획이다. 이미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일본 등의 유명 갤러리 등과 업무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이들을 통해 세계적인 작품들을 국내에 지속적으로 들여올 방침이다. 경매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온 위작 시비를 차단하기 위해 자체 국제미술감정연구소를 별도로 둬 미술 감정의 질적 성장도 동시에 꾀하고 있다.국제 시장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정부, 기업, 소장가, 작가들과 함께 작가의 모든 작품이 수록된 레조네(작가의 전 작품을 소개한 도록) 카탈로그를 제작하며 파리 런던 도쿄의 전문 기관들과 협의해 미술품 감정의 표준화도 추진하고 있다.이를 통해 정 회장이 꿈꾸는 최종 목표는 ‘미술 한류(韓流)’다.“미술이 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음악은 연주자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지만 미술은 작가와 관객을 바로 만나게 해준다는 점이 다릅니다. 요즘 전 세계 미술 컬렉터들이 일본 중국 인도 작가에 관심이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이들 국가는 특징이 너무 강합니다. 단적인 예로 공간 디자이너인 제가 보기에 일본의 미술품들은 집에 걸 수 있는 작품이 전체 10%가 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작품을 위한 작품일 뿐이죠. 그러나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이미 글로벌화된 상태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이미 한류 바람이 불었는데 미술 시장에도 한류 바람이 불지 말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엔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D옥션과 함께 한국미술무역협회(KATA)를 설립하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술품의 국제 교류 활성화를 위해 설립되는 한국미술무역협회는 매년 KATA 페어를 개최해 국내 신진작가들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첨병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또한 내년 하반기 중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부인 미국 뉴욕에 국내 작가 전용 갤러리인 엠포리아 뉴욕점을 오픈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 밖에도 정회원 외에 글로벌 회원제를 별도로 실시하는 등 고객 차별화도 모색 중이다. D옥션의 글로벌 회원에게는 국내외 미술품에 대한 교육과 정보, 미술 전문가와 일대일 상담 서비스가제공된다.또 해외 유수의 미술품 경매 회사에 작품을 출품하거나 구입할 때 수수료를 적게 받는 서비스 등도 기획하고 있다.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