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더웠던 여름,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바다와 산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가을이 왔다.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 예나 지금이나 계절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름이 되면 휴양지를 위한 리조트 룩을,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는 슈트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의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 말하지 않았던가. 여자는 하이힐을 신을 때, 남자는 슈트를 입을 때 긴장감을 갖는다고.슈트처럼 모든 남자들이 공통적으로 매일 접하는 옷도 드물다. 슈트는 흔히 남성들의 유니폼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학창시절 교복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기성품의 공산품 규격으로 생산됐던 교복과 내 몸에 꼭 맞춰야 하는 슈트를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남성들의 슈트 스타일은 가장 친근해 보이면서도 가장 어색해 보인다. 가끔 외국인들을 만나면 한국 남성들의 패션 감각에 대해 한소리 하는데, 그중 으뜸은 바로 슈트다. 우리는 ‘슈트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큰 차이 있겠어?’라고 하지만 실제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장 입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슈트다.사실 슈트를 잘 입기로 치자면 이야기할 것이 한도 끝도 없다. 슈트의 기본은 질서와 긴장감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완벽함의 추구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작은 실수들을 슈트 입기에서 범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저지르게 되는 실수 몇 가지만 살펴보자.요즘 캐주얼이 유행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슈트도 캐주얼한 감각으로 입는다. 벨벳 재킷에 진을 멋지게 코디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상관없다. 그렇지만 슈트는 사실 재킷과 팬츠가 하나를 이루는 아이템이다. 간혹 슈트 재킷을 다른 팬츠와 함께 착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통 포멀 슈트를 이렇게 입으면 마치 아빠 옷을 입은 대학생 같은 차림이 되기 쉽다.더운 여름철 여의도 증권가나 명동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한국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짧은 반소매 셔츠 차림이다. 심지어 그 안에 훤히 비쳐 보이는 러닝을 입고 활기차게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사실 서양에서도 남성들이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1934년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클라크 게이블이 맨살에 셔츠를 입은 후, 수많은 남성 관객들이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게 됐다. 이 영화 덕분에 미국의 속옷 업계는 도산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영화 속의 클라크 게이블은 멋졌다.아무튼 한국의 여름 비즈니스 웨어는 어느 순간부터 짧은 소매의 와이셔츠가 기본이 돼버렸다. 심지어 최고경영자(CEO)들도 심심치 않게 짧은 반소매의 와이셔츠를 입는다. 물론 더운 여름철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사무실에서 긴소매 옷을 입고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요즘은 ‘쿨비즈’라고 해서 국가적으로도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간편복을 입고 근무하는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진정한 비즈니스맨이라면,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할망정 절대 짧은 소매의 와이셔츠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한 그 안에 훤히 비치는 러닝을 입는 실수도 해서는 안 된다.한국 남성들의 또 하나의 웃지 못할 실수는 바로 스포츠용 하얀 양말을 슈트와 함께 착용하는 것이다. 때로는 커다란 로고가 버젓이 보이는 하얀 양말을 신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보면 다섯 발가락을 위한 무좀 양말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남성들도 흔히 만날 수 있다.정장용 양말을 운동화에 신는 것만큼이나 슈트에 스포츠용 하얀 양말은 신는 것은 기본에서 벗어난 일이다.슈트는 화려함으로 승부하는 옷이 아니라, 은근한 실루엣의 분위기로 압도하는 옷이다. 지나치게 튀려고 한다면, 슈트가 입는 사람을 금방 광대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절제가 최대의 미덕인 셈이다. 이번 가을에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영국 새빌 로(Savile Row)의 정통 슈트에서 영감을 받은 클래식 슈트 스타일들을 다양하게 제안하고 있다. 클래식한 슈트와 함께 여름 동안 흐트러졌던 우리의 일상도 다시 긴장감이 충만한 일터로 돌아갈 때가 됐다.이정민 퍼스트뷰코리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