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도심이 장마로 얼룩져 있다. 여우비가 오나 싶더니 검은 구름이 몰려와 이내 폭우로 변한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마음도 답답하다. 일기예보를 보아도 당분간은 매일 비 소식이다.강원도는 어떨까? 경상도도 천둥과 번개? 비 내리는 8월 중순, 소백산 부석사로 길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 신림을 지날 무렵부터 빗방울이 세차게 몰아쳤다. 여름의 녹음이 빗물에 젖어 더욱 선명하다. 치악산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다. 산봉우리를 감싸며 피어오르는 운무가 신비롭다. 그 옛날 신선들도 사계절 그 어느 철보다 여름의 빗속 운무를 사랑했으리라.비는 계속 내렸다. 제천과 단양을 지나 죽령터널을 한참 빠져나오니 소백산 자락에 멀리 풍기읍이 낮게 깔려 있다. 풍경이 바뀌었다. 창밖 눈길 닿는 곳마다 사과밭이다. 푸릇한 풋사과가 나무마다 가득하다. 어느 사과는 종이 봉지에 몸을 두른 명품족으로 있는가 하면 한쪽에선 늙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애처롭게 늘어져 있는 퇴물족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래도 가을이 되면 모두 붉은 빛 탐스러운 사과로 익을 것이다. 풍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사과밭이다.부석사 가는 길 풍기에서 부석사 가는 길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당간지주가 생각나 빗길에 먼 길을 달린 피로도 달랠 겸 잠시 차에서 내렸다. 서원의 수려하게 뻗은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장마철 서원 구경 맛이 새롭다. 멀리 경렴정(景濂亭) 정자가 단정히 자리하고 당간지주가 노송 사이로 당당히 서 있다. 서원에 무슨 당간지주? 원래 당간지주는 절의 영역이나 행사를 알리는 목적으로 사찰 입구에 세워 놓는 당간을 지탱하는 돌이다. 이곳 소수서원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때 숙수사(宿水寺) 절터의 유물이다. 지주의 나이와 조각이 오래되고 퇴락해 볼수록 아름답다. 비에 젖은 당간지주는 물기를 머금어 한층 짙어 보이는 소나무 등걸과 어울려 멋있다. 햇살이 쨍쨍한 가을에 이런 맛이 날까? 돌은 물과 어울려야 제 맛이다. 오죽하면 수석(水石)이라고 이름 했으랴. 산석(山石)도 있지만 수석은 물살에 제 몸을 서로 부대끼며 아픔을 겪은 연후에 담담한 부드러움과 군살이 쪽 빠진 수려한 아름다움이 있다. 송나라 미불(米)은 수석과 괴석을 유독 좋아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아름답고 기이한 괴석을 보고 절을 했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배석도(拜石圖)는 돌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살아있게 하여 수많은 문인 묵객의 시제(詩題)와 화제(畵題)가 되었다. 물과 돌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인가 보다.소수서원을 뒤로하고 차를 몰았다. 부석을 지나 드디어 부석사에 도착했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다. 저녁이 되자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아쉬움 속에서도 석양의 소백산을 그리며 부석사에 올랐다.부석사는 소백산맥 봉황사 자락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승주 선암사나 합천 해인사처럼 부석사는 계곡이 없다. 대부분 한국의 오래된 절집들이 계곡을 끼고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서 뒷 봉우리와 앞 산 사이로 계류를 감싸 안고 좌청룡 우백호의 전형적인 명당에 안온하게 자리 잡은 것과 비교하면 부석사의 정취는 경치밖에 볼 것이 없다. 요사에 앉아 밤늦도록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참선삼매에 들거나 새벽 번뇌의 육신을 맑게 씻어줄 맑은 물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건조하리만큼 지형이 팍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석사를 찾아오는 이유는 1376년 중수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소백산맥이 끝없이 펼쳐지는 석양의 ‘풍광(風光)’이 있기 때문이다.거친 주차장과 어설픈 조경에 눈 길 둘 곳 몰라 하며 서먹하게 절에 올랐다. 못 볼 것을 보면 볼 것을 못 본다. 이 좋은 풍광 속에 저 어지러운 간판들과 조형물이 웬 말인가. 눈 감고 절에 올랐다.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사과밭 사이로 어둔한 모습 보이고 그 사이 어린 은행나무들이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나고 풋풋한 자태를 갖춰 가며 가을의 황홀한 황금 낙엽을 준비라도 하듯 낮게 이는 바람에도 잎마다 춤춘다. 무량수전이 자리하고 있음직한 산중턱 뾰족한 산봉우리에 솔숲이 다복하다. 그 뒤로 연이은 소백산맥은 여느 산봉우리와 다름없어 보였다. 일주문을 지나 곧바로 오르다가 당간지주를 옆에 끼고 오른쪽 길로 굽어드니 천왕문 석축이 아담하게 눈에 든다. 비로소 부석사의 시작이다. 눈 부라리고 무섭게 보이려고 하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은 사천왕 앞에서 잠시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차오른 숨을 잠시 고르고 다시 절에 올랐다. 길바닥엔 거친 돌을 그냥 깔아 앞만 보고 가다 보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내 주변부터 잘 살피라는 옛 조사의 말씀을 떠올리다가 절에 오르는 참뜻을 되새겼다.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앞을 올려다보니 성벽 같은 석축 계단이 가로막고 있다. 고려시대에 쌓은 아름다운 자연 석축이다. 이즘엔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석축 아래만 조금 드러나 그 아름다움을 다 보지 못하지만 낙엽이 지고 겨울이 되면 맨살의 부드러움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앞을 보면 그냥 하늘과 석벽뿐이다. 그 위로 돌계단이 놓여있는데 석벽이 가파르고 높아 중간에 석단을 만들어 가파름을 보완했다. 그런데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이 돌계단에 재미라기보다는 아찔한 의도가 숨어 있다. 아래 석단 오르는 계단의 길이가 위 석단의 계단 길이보다 1m는 작아 아래에서 언뜻 올려다보면 계단의 폭이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원근법 때문에 멀리보이는 사물이 소실점을 향해 줄어드는 착시 현상으로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계단 양끝에서 정신없이 한눈팔면 석축 아래 그대로 곤두박질치게 마련이다. 아찔한 상상이 절집의 선연한 가풍을 보는 듯하다. 비가 그쳤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층층이 벌려 있는 부석사 석축 위엔 무엇이 있을까?. 마지막 돌계단을 딛고 석축 위에 서니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고 전면으로 종루와 요사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아하! 사람들이 이런 풍경을 보려고 부득불 오르는구나 싶어 나도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뜰 것만 같다. 바람이 시원하게 분다. 무량수전에 어서 올라 노을 지는 저녁 풍광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이 바빠진다. 전면은 팔작이고 후면은 맞배로 지어졌다. 지붕 12칸 종루 기둥 아래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경상도 사찰의 진입 공간이 그러하듯 부석사도 누하진입이어서 누각 위로 올라서기 전에는 기둥 사이 보이는 평범한 옆 풍경 이외에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종루를 올라서자마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새로운 풍경과 공간이 넉넉하면서도 우아하게 펼쳐진다. 작은 마당을 대각선으로 빗기어 돌계단 동선이 이어지고 당당한 석축 위로 안양루(安養樓) 누각이 허공에 걸려 있고 그 뒤로 무량수전 지붕이 살며시 드러나 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맛이 볼 때마다 새로워 다시금 종루 난간에 기대어 안양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안양루는 무량수전보다 꼭 200년 뒤인 1576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범한 팔작 누각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바라보면 단층이지만 종루에서 올려다보면 석축에 몸을 기대어 다리기둥을 세워 지은 2층집이다. 안양루의 진면목은 누각 아래에서 어간을 향해 걸어 올라가며 돌계단에서 바라보는 난간과 팔작지붕의 위용보다는 무량수전 안에서 문 사이로 내다보는 풍경이다. 말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있다. 어쩜 저리 조촐한 평면에서 아무런 위엄도 권위도 보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사람들은 무량수전의 연륜과 고려 건축의 위엄에 감동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기둥의 굵기와 높이, 그리고 기둥 사이로 만든 여백 너머로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운 비례미가 돋보이는 사대부가 풍모의 안양루를 더 사랑한다. 더도 덜도 없이 있을 것만 있는, 텅 빈 공간. 그러면서도 부석사의 주연인 무량수전에 가려 영원한 안양루는 영원한 조연일 수밖에 없지만 부족한 자식이 더 애처롭듯 나는 무량수전에 오를 때마다 안양루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보았다. 안양루 아래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아름다운 통일신라 석등과 화사석 너머로 ‘무량수전’ 현판이 보이고 비로소 부석사의 진면목인 무량수전 앞마당에 올라선다. 비온 뒤 울어대는 한여름 매미소리와 함께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닦는다. 저녁이 점점 더 깊어간다. 장마 끝에 지는 노을이 구름 사이로 언뜻 스치듯 내린다. 목백일홍이 뭉게구름처럼 핀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전각들의 풍경과 노을 지는 저녁의 깊이가 장관이다. 첩첩이 산들이 파도치듯 뻗어내려 하늘과 맞닿아 있다. 부석사를 건립한 신라의 의상대사는 대사를 흠모하는 당나라 여인 선묘(善妙)가 부석사 절터를 점거했던 도적들에게 거대한 바윗돌을 들어 보이는 신통력을 인연으로 세웠다 하니 그 깊은 의미는 차치하더라도 풍광 하나만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치가 너무 좋으면 고승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틀림없는 말이다. 참으로 부석사 텅 빈 노을의 경치는 천하절경이다.무량수전은 겉에서 보기에는 단순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배흘림기둥에 팔작집이다. 주심포에 팔작지붕을 경영하려니 추녀의 하중을 견디기가 마땅찮아서 사방에 활주를 대어 추녀를 버티고 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이 바뀐다.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과 깊이 사이에 장엄과 침묵이 흐른다. 기단을 반듯하게 다듬고 건축 부재도 모두 치목을 해서 고려 무인의 기상을 대하듯 근엄하기조차 하다. 직선과 직선이 교차하는 천장과 대들보의 웅장함은 현대 건축에서 느끼는 모던함이 배어 있다. 무량수전 전면의 창호는 모두 조선 후기에 빛과 환기를 위해 들어열개 창호로 바꿨지만 후면의 판문과 광창은 고려 건축 그대로다. 뒷문 광창 13개의 기둥 사이로 여름의 초록이 실내의 어둠속에 동쪽을 향해 정좌해 앉은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의 번쩍이는 금빛과 치켜뜬 눈매, 불타오르는 광배조각과 대비돼 묘한 침묵을 자아낸다. 조선 불화 한 폭이 구석에서 흔들리는 촛불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저녁 7시, 허공에 다리를 담그고 표표히 떠있는 안양루 아래 종루에서 둥 둥 두둥둥…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법고 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린다. 무량수전은 저녁 어둠에 점점 더 깊이 가라앉고, 처서로 달려가는 계절의 길목, 매미 울음은 짧은 시절 인연을 애태우듯 더욱 요란하다. 얼마나 많은 부처들이 이곳을 다녀갔을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노보살의 그믐밤 철야 정진 기도 소리에 소백산 노을이 세월과 함께 서서히 저문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