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 면도기와 함께 만나는 앞선 사람들 특별함으로 세상에 도전하다

조계의 휴머니스트.’ 매주 월요일 저녁 SBS TV가 방송하는 ‘솔로몬의 선택’을 통해 낯이 익은 김병준 변호사의 별명이다. 그에게선 변호사라는 직업이 주는 ‘차갑고 냉철한 엘리트’의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투박한 경상도 억양에 어휘 선택도 직설적이다. 때로는 법리 이전에 서민들의 정서를 중시하는 소수 의견을 내놓아 다른 패널들과 공방을 벌이기도 한다.김 변호사의 휴머니스트적인 모습은 그가 걸어온 길에서 함양된 듯하다. 그는 청소년 시절의 방황, 뒤늦게 시작한 법학 공부, 35세에 합격한 사법시험 등 남들보다 한발 늦은 걸음을 해 왔다. 하지만 인생의 결정적 기로에서 남다른 결심을 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인생을 개척해 왔다는 점은 ‘인생에서 결코 늦은 결정이란 없다’는 희망을 전파한다.경북 군위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3남 1녀 중 셋째였던 김 변호사는 부모님의 교육열에 초등학교 5학년 때 홀로 대구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 중학교 때까지 착실한 모범생의 생활을 해 오던 김 변호사가 방황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춘기 첫사랑과의 짧은 만남과 이별 때문이었다. “만난 지 몇 달 안 돼 여자 친구로부터 ‘우린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받은 후 아픔을 겪으면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노래를 배웠지요.” 고교생 김병준은 이후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술 담배를 배웠다. 김 변호사는 자신의 이 시절을 영화 ‘친구’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과 비슷하다고 했다. “반 성적은 10등, 29등, 38등, 41등으로 내려갔지만 지금도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인생의 많은 영양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지요.”방황은 대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적성에 따라(김 변호사는 이를 ‘적당한 성적’에 따라서라고 설명했다) 지방대학 사회학과에 81학번으로 입학한 후 ‘출근은 다방으로, 퇴근은 당구장으로’ 하는 생활이 1년간 반복됐다. 그러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화두에 접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동서양의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마구잡이식 독서의 끝에 어느 날 해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내가 왜 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여기 이렇게 숨 쉬고 살아 있는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만 고민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학교 2학년 영어 교과서를 붙잡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수업 시간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2학년 1학기부터 평점이 A학점을 넘기 시작했고 공부에 자신감이 붙었다. 법조인을 꿈꿨지만, 법학 공부는 자력으로 하겠다는 생각으로 졸업 후 일단 한국통신에 취직부터 했다.입사 1년 뒤 예기치 못한 일이 닥쳤다. 동생이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자식을 떠나보낸 아버지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역시나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나도 언제 불시에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 죽음 앞에 내가 당당하기 위해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큰 승부욕을 보이지 않았던 김 변호사는 비로소 어릴 때부터 막연히 가져왔던 꿈이었던 변호사의 길을 갈 것을 마음먹었다. 당시 취업 선호도 1순위였던 한국통신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서른의 나이에 성균관대 법학과에 편입해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한창 왕성하게 일할 나이인 30~35세에 고시 공부를 했으니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동생과 아버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 자신에게 큰 힘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부인이다. 한국통신 직장 동료였던 부인에게 당시 김 변호사는 퇴직 사실을 통고하며 “우리는 가야 할 길이 다르니 당신은 나를 잊고 당신의 길을 가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결혼 뒤 부인은 어렵고도 힘든 고시의 길을 든든히 뒷바라지해 준 일등공신이 되었다. “나의 첫사랑이 조국이었다면, 마지막 사랑은 당신입니다.” 김 변호사가 부인에게 프러포즈할 때 썼던 이 한마디는 방송을 타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김 변호사는 사법시험과 연수원 생활, 부인의 직장 문제로 37세에야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애만 태우다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40세가 돼서 뒤늦게 아이를 가졌으니 기쁨은 더욱 컸다. “아이가 태어난 날 최대한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양복을 입고 머리에 헤어 젤까지 발랐다”는 그의 얘기만 들어봐도 그 기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늦게 얻은 아이인 만큼 그가 가정에 쏟는 노력도 남다르다. 요즘 같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적어도 1주일에 하루는 가족과 함께 보내고 한 달에 한 번은 가족여행을 가고 있다.김 변호사가 방송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 때 오락시간이면 항상 배꼽을 뺄 정도로 웃겼던 동창이 어느 날 방송국 PD가 됐다면서 연락을 해 온 것. 법률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는데 출연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그는 방송에서 연예인 뺨치는 입담을 선보이며 단숨에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딱딱한 법률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곁들였는데, 이런 부분이 통했던 것이다. “실컷 얘기한 법률 지식은 다 잘려나가고 농담한 부분만 부각돼서 처음에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차츰 방송에서 원하는 것들이 그런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이런 입담과 재치는 어디서 왔을까.그는 “아마도 방황과 사색으로 보냈던 청소년기의 시간들이 결국은 자양분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김 변호사는 현재 ‘KBS 라디오 ‘행복한 오후(왕영은 진행)’에 출연 중이고 6월부터는 SBS TV ‘부부솔루션-미안해 사랑해’의 진행도 맡고 있다. 구청 문화센터 등의 강의 요청도 밀려와 주 3~4회 생활법률 강의에도 나서고 있다.변호사 본연의 업무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름이 알려지면서 사건 의뢰가 더 많이 들어와 주말에도 쉬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이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도 그의 가슴에는 항상 어린 시절 시골의 모습과 청소년기의 방황, 대학 시절의 사색이 들어 있다. 그래서인가 그는 아들에게도 조기 교육 따위로 부담을 주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그저 자신의 아들도 꼭 자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부인 같은 여자와 결혼해 자기 같은 아이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넉넉함이 싸움으로 얼굴이 붉어진 부부들에게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하는 김 변호사만의 비결은 아닐까.글 우종국·사진 서범세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