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낀 숲 속에 서 있는 소나무의 정기(精氣). 만약 기 측정기라는 것이 있어서 배병우의 사진 작품을 측정할 수 있다면 그 수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화면 속에는 소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소나무를 비롯해 바다, 제주의 오름 등을 촬영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색다른 자연의 모습을 보게 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웃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성행위를 엿보거나 옷을 벗는 것을 보고 성적 흥분을 느끼는 관음증과는 다른 것이다. 즉, 사진작가 배병우는 우리가 소나무 숲 속에 서 있으면서도 ‘눈으로 잡아내지 못했던’ 모습을 담아 내보인다. 눈부신 햇살을 등에 지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한 소나무, 생각에 잠긴 듯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바다 등의 모습은 건축물이나 오브제를 촬영한 것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닌다.1950년 여수에서 태어난 그는 1970년 홍익대 미술대 응용미술학과와 동 대학원 공예도안과를 졸업했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학부 시절에 이미 사진작가가 되기로 결심,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다니며 고향인 여수 앞바다, 경주의 소나무, 종묘 등 한국적인 자연미를 사진에 담았다. 그러다가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소나무 사진전을 개최하면서 ‘소나무 찍는 사진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그의 명성이 높아진 데에는 팝가수 엘튼 존도 일조했다. 엘튼 존이 그의 소나무 사진 작품을 구입하면서 사람들에게 배병우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것.“인생의 성공에는 명료성이 없다. 그러나 인생은 승부를 걸어야 한다. 승부를 거는 사람만이 멋진 사람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일찍 일어나 투자한다면 그 분야의 최고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 분야에서 훌륭한 사람은 된다. 나는 30년 동안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사진의 3분의 1은 없다. 고비에서 주춤주춤하다 시간이 가는 법이다. 매일매일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사진이지만 스튜디오에서 모델의 움직임 속에서 컷을 잡아내는 작가와 그와는 차별점이 있다. 모델에게 포즈를 요구하며 원하는 컷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 촬영과 달리 자연을 촬영할 때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자연이 순간순간 머금는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숲 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듯 원하는 형태와 수령의 소나무를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이다.“농부가 농사짓는 데 기교 같은 것은 필요 없지 않은가. 이른 아침부터 논, 밭에서 열심히 일할 뿐이다. 아버지는 새벽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날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났다. 경매 시간을 놓치면 그날 하루는 허탕을 치니까. 어촌 ‘촌놈’인 나도 그런 기분으로 매일 아침 일어난다. 해뜨기 전이나 해질 즈음의 광선이 섬세하고 미묘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상황에 따라 찍는다. 솔숲에서 특정 나무를 촬영하는 것은 주변에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만 보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예술가라면 흔히 자유롭고 방탕하게 생활하며 영감이 떠오를 때 붓을 집어 드는 사람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상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그렇지 않다. 일상에서 대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촉각을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 작품으로 풀어낼 것인지 항상 고민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다. 젊은 시절 자신의 이런 무모한 도전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언젠가 전시장에 걸려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불안한 상태에서 말이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서울예대에서 줄곧 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큰돈을 만지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필름을 프린트해서 작품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이 간간이 팔리는 작품 수입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오랫동안 ‘적자’로 살아왔다.“이름이 알려지고 작품 가격이 올라간다고 해서 생활에 변화가 생긴 것은 없다. 예전보다 조금 여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보다 인지도가 높아진 만큼 좋은 전시장에 내 작품을 걸 수 있다는 즐거움이 크다. 가수가 좋은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고, 운동선수가 시설 좋은 운동장에서 경기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좋은 전시장에서 전시하는 것이 목표지 돈이 목표는 아니다.”최근 작품 가격이 몇 개월 걸러 2배, 3배로 뛰어 올라도(이미 판 작품의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그에게 경제적 이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판매되는 가격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단지 필름 값 걱정 없이 촬영할 수 있고, 와인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것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와인 마니아인 배병우. 전라도 출신에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 덕분에 미식가이기도 한 그는 지방 촬영을 가더라도 식도락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전날 술을 마셨더라도 기상 시간은 어김없이 해 뜨는 시간 이전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몇 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목에는 새빨간 머플러가 둘러져 있었다. 이번에 만났을 때에는 작은 꽃무늬가 프린트 된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비단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 자신이 사는 공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포트폴리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멋’에 무심하지 않는다고 한다. 동시에 그의 멋스러운 복장에는 원칙이 있다. 언제든 사진을 찍으러 갈 수 있는 옷차림이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시간 관리 능력, 자기 관리 능력은 타고난 예술성 못지않게 오늘날의 배병우를 완성시킨 요소다.그는 우직하다. 목표 지향적이고 다소 계산적인 질문에 허를 찌르는 답변을 하는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본 자연물을 카메라에 담고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지식과 부를 동료 후배 제자들과 공유하고 변화에 휩쓸리지 않고 주말이면 묵묵히 카메라 둘러메고 전국의 산야를 헤매고…. 잡지나 TV 등의 인터뷰 요청에 기꺼이 시간을 내는 이유도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 길을 터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며 속내를 털어놓는 데 주저함이 없다. 요즘 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착하다’는 말이 더 이상 높이 평가받지 못하듯 ‘우직하다’는 것 또한 경쟁력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작가 배병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연 그러한가’라며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았다. 지혜로운 자가 때로는 자기 꾀에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글 정지현 미술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