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산 해인사(海印寺) 가는 길, 홍류동 계곡 울창한 송림 사이로 유월의 초록이 싱그럽다. 해인사 초입에서 절 입구까지 구불구불 차가 어찔하다. 예전에는 아래 마을 버스 종점에서 절까지 반나절은 족히 걸었음직한 산길이다. 그래도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에 마음 달래며 쉬엄쉬엄 오르는 해인사 산길이 참으로 좋다. 절에 오르다 힘이 들면 다리라도 쉴 겸 홍류동(紅流洞) 계곡 정자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선인들의 자취를 살핀다. 농산정(籠山亭), 현판의 고색도 좋고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신라 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숨결도 아름답다. 골짜기에서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하얀 너럭바위에 부서지는 유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잠시 몸도 마음도 자연에 맡겨 부서지는 물방울에 속진의 때 씻어버리고, 다시 여장을 추슬러 계곡을 오른다. 해인사, 1970년대 봄 대학교 학과 답사에 처음 왔다. 그때만 해도 홍류동 계곡은 지금처럼 인공이 넘치지 않았다. 비포장길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는 소나무도 청정했고, 절 아래 민박촌도 자연스럽게 계곡 언저리를 중심으로 벌려 있었다. 청춘과 낭만으로 가득했던, 아니 치기만만했던 대학시절, 해인사 대적광전 계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의 빛은 낡고 바랬지만 아직도 그 안에서 친구들과 환하게 웃고 서 있다. 장경각 입구 둥근 출입문으로 들어가 팔만대장경판을 창살로 들여다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홍류동 계곡을 오르다 일주문을 만나면 산문 양쪽으로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의 수백 년 묵은 고목이 도열해 있다. 해인사, 천년 고찰을 나무가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 해탈문을 지나면 비로소 구광루와 대적광전 장경각 등 대가람의 위용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 의상대사의 손제자인 순응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의상대사는 신라에 화엄종을 확립한 스님으로 당시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 창건의 숨은 주역이었다. ‘해인사’라는 이름은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가운데 ‘해인삼매(海印三昧)’란 데서 유래한다. 즉, 바른 깨달음으로 인한 지혜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경지, 이것이 곧 해인삼매다. 화엄사상은 해인사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떠받치는 근본 사상이 되었다. 해인사는 불교의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 가운데 법보(法寶)사찰이다. ‘해인사’라고 하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떠오른다. 이 ‘팔만대장경‘이야말로 법보의 근본이다. 팔만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만든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1232년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자, 고종 24년(1237) 대몽항쟁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고려 조정에서 강화도에 대장경 조성 총괄기구인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만든 것이다. 대장경은 본격적인 판각에 들어가 고종35년(1248)까지 12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대장도감에서는 판각용 나무의 산지 확인과 벌목, 그리고 바닷물에 담그거나 소금물에 끓여 나무의 진을 빼고 결을 삭히고 그늘에서 건조하는 일, 그런 다음 판각에 필요한 두께와 크기를 다듬는 연판 작업 및 경전 글씨를 경판에 맞추어 베껴 쓰도록 하는 등사 작업 등을 총괄하였다.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경판을 새겼다.팔만대장경은 실제 경판의 숫자가 팔만천삼백사십 장에 이르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번뇌가 무한하여 팔만사천 번뇌가 있는데 이를 다스릴 수 있는 팔만사천 부처의 가르침을 판에 새긴 대장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대장경은 판각된 뒤 강화도 선원사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이 건국하면서 1398년 오월 한양을 경유하여 1399년 정월 해인사로 옮겼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나장에 보관되어 있다. 국보 32호다. 팔만대장경 판하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대장경은 북송의 관판(官版)대장경, 거란대장경, 고려의 초조대장경 등이다. 이들 대장경은 경판은 물론 판본조차 거의 사라져 현재 그 내용을 추적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자료가 팔만대장경이다.또한 팔만대장경은 워낙 방대한 자료와 정확한 내용을 갖추고 있어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일본과 중국의 대장경은 물론 이십세기 초 일본에서 인쇄본으로 만들어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불교 연구의 기본서로 활용하고 있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조차도 팔만대장경을 정본으로 사용했을 만큼 탁월하다. 팔만대장경은 판각 기술의 측면에서 보아도 대단하다. 판각용 정서본 즉, 판서본을 필사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 적어도 수백 명이 넘고 그것을 판에 새긴 각수(刻手)들 또한 그 이상으로 많았을 터인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장경의 글씨는 마치 한 사람이 쓰고 새긴 듯 한결같다. 더구나 대장경의 새긴 총 글자의 수가 5200만 자가 넘는데, 이 중에 단 한 자의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없다고 하니 종교적인 신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지 7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거의 아무런 손상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롭기조차 하다. 대장경 목판이 마치 어제 만든 듯 생생하다. 요컨대, 팔만대장경은 고려인의 성실성과 열정이 더하여 고려인의 과학과 종교의 힘이 낳은 목판 인쇄 문화의 결정판이며 오늘날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 문화 유산이요 세계 보물이다. 해인사의 중심 불사인 대적광전을 뒤로 돌면 고색창연한 축대 가운데로 높고 가파른 돌층계가 있다. 그 계단을 올라서 일각문을 넘으면 넓게 두른 담장 안에 네 채의 건물이 긴 네모꼴 평면을 이루고 있다. 흔히 ‘장경각(藏經閣)’이라 부르는 팔만대장경판과 그 밖의 경판들을 간직하고 있는 대장경판전이다. 남북의 두 건물에는 각각 수다라장(脩多羅藏) 법보전(法寶殿)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두 건물의 크기와 모양이 같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홑처마집이다. 보통 사간판고(寺刊版庫)라고 불리는 동서의 두 건물도 정면 2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그 크기와 모양이 같다. 장경판전은 세조4년(1458년) 원래의 판전 건물이 비좁아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5세기 초에는 건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1622년과 1624년에 수다라장과 법보전을 수리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장경판전은 현재 해인사 수십 채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장경판전은 국보 제52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장경판전의 과학과 미감 장경판전은 대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해 적정한 온도와 습도 유지, 직사광선의 차단, 원활한 통풍과 환기 등 보존을 위한 요소들을 주도면밀하게 베풀어 놓은 건물이다. 바닥에는 석회, 숯, 소금을 겹겹이 다지고 그 위를 황토로 마감하여 무더운 여름철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한 겨울철 습기를 내뿜어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장경판전의 살창 구조는 일광의 조절뿐만 아니라 환기와 통풍에도 과학적인 구조를 적용했다. 두 건물의 앞면 살창은 위쪽이 작고 아래쪽이 크다. 반대로 뒷면의 살창은 위쪽이 크고 앞쪽이 작아 한 건물의 앞뒷면이 서로 상반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즉, 남쪽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아래쪽에서 잘 받아 들여 건물 안에서 원활한 대류작용을 유도한 다음 뒷면의 위쪽 창으로 내보내기 위한 탁월한 구조다. 옛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의 소산이다. 장경판전은 단순한 건축이다. 덤벙주초 위에 은은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간단한 초익공을 올려 보머리를 받고 있을 뿐이다. 처마도 서까래가 한 줄 걸린 홑처마다. 위아래로 뚫린 살창 역시 기능에 충실할 뿐 아무런 장식도 기교도 없다.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판전 건물은 실용이 낳은 디자인이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홍류동 계곡의 맑은 시냇물처럼 해인사를 다녀온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높다. 여름 장마가 주말부터 온다 한다. 습기 한 점 없는 유월 날씨가 꼭 초가을 같다. 마당 감나무 아래 지난주부터 감꽃 떨어진 자리에 살 돋은 애기감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가을을 기약하고 탐스러운 감 열매의 꿈을 부풀리다가 이내 가지에서 떨어져 제 몸 솎아내기를 한다. 떨어진 감꽃을 대나무 빗자루로 쓸어내니 마당 구석에 수북하다. 나도 지금 필요 없는 삶의 부스러기를 떨쳐 버려야 할 텐데…. 더 나은 삶을 위하여…. 홍류동 계곡의 맑은 시냇물처럼, 가야산 상봉의 흰 구름처럼 맑고 청정하고 싶다. 마당 장독대 옆 소담하게 핀 접시꽃 다홍색이 사과나무 잎의 초록과 어울려 유월이 더욱 싱그럽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 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 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