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 필자는 어릴 적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꿈을 수도 없이 꿨다. 물론 스페인도 그중 한 곳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방문하게 된 스페인.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영화와 TV에서나 접하던 플라멩코와 투우가 있는 정열의 나라, 필자가 좋아하는 레알마드리드가 있는 축구의 나라,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무적함대의 나라, 유럽 안에서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을 엿볼 수 있는 나라, 이베리아 반도 한가운데, 남국의 특성이 짙게 배어 있는 ‘태양의 나라’, 내 가슴 속 열망의 대상이었던 스페인으로 떠났다.비행기는 어느새 스페인의 심장부인 마드리드 국제공항(바라자스 국제공항)에 다다르고 있다. 창밖에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다양한 현재의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마드리드가 서서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비가 내렸는지 기내에서 바라보는 마드리드의 모습은 막 샤워를 마친 여인의 모습처럼 촉촉이 젖어 감성적으로 느껴졌다. 기내 방송이 마드리드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잠시 눈을 감았다. 20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아마도 장거리 비행의 피곤함과 함께 오랫동안 동경하던 나라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리라.정열의 태양을 기다리듯 늘 꿈꾸었던 나라,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벅찬 설렘을 느끼며 마드리드 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다. 그 역시 예술의 나라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답게 예술가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일행은 준비된 차량으로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설명을 들으며 호텔로 이동했다. 버스를 타고 차창 풍경을 보면서 현대적인 건물과 함께 평범한 야경을 간직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마드리드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이끌려 잠에서 깨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마드리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마드리드의 전경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침 일찍 시내 관광에 나섰다.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는 명실 공히 스페인을 대표하는 도시다. 1218년에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세워졌고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581년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에 이곳으로 수도가 옮겨진 뒤 4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마드리드에는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등 유적들이 많고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도 곳곳에 남아 있다.시내 관광을 마치고 스페인의 옛 수도이며,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톨레도’로 향했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1시간쯤 달렸을까. 언덕 아래 자리 잡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밀조밀하고 정교하게 조성된 톨레도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길다는 타호강 삼면에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 요새다.도시 가까이에 이르니 ‘알카사르성’이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알카사르성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스케일이 큰 영화에 등장할 법한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성이었다. 오래된 도시, 톨레도는 ‘안전 도시’ 또는 ‘방어 도시’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파생된 말로, 1561년 펠리페 2세에 의해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스페인의 수도였다. 현재 수도로서의 명예는 마드리드에 넘겨줬으나 아직도 종교, 역사, 예술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톨레도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유적 도시로, 고대 로마시대에서부터 고트, 이슬람 정복시대, 가톨릭 군주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을 남겼다. 그러면서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톨레도 구시가지를 걸었다.필자가 서 있는 이곳은, 3000년 전 시간이 멈춘 도시였다. 인터넷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하는 요즘의 첨단 시대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시다.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관광지로 변모돼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했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구시가지를 걸으면서 사진을 찍고, 계속 또 그렇게 걷고 찍었다. 수천 년 전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의 톨레도는 과거와 변함없이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석양을 등지고 그 옛날 찬란했던 톨레도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걸었다. 톨레도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한낮, 스페인의 남부 도시 그라나다를 향해 버스로 무려 5시간을 달렸다. 저 멀리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얀 눈에 싸여 순백의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그라나다에 도착한 이방인들을 맞이했다. 시내에 들어오자 스페인 남부도시답게 따뜻한 기온이 온 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밤 9시쯤 호텔에 도착했다. 장시간의 버스 여행 때문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호텔 방에 간단히 짐을 풀고 스페인에 관한 역사책을 읽으며 잠이 들었다.다음날 아침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이슬람 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다. 초라한 입구에서는 약간 실망했는데 막상 알함브라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사람을 일순간 압도하는 듯한 웅장한 기운 속에 정교함과 섬세함, 그야말로 황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절실히 느낀다.‘과연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인가.’ 내 입에서 이런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섬세할 수 있는지, 한 번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궁전을 둘러보는 내내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마치 다른 시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곳은 1000여 년 전의 이슬람시대 그대로인 것이다. 이곳에서 시계 같은 것은 일찌감치 가방 안에 넣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순간에 시간을 보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과거로 돌아간 이곳에서 가이드의 청산유수 같은 언변을 통해 이슬람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아랍어로 ‘빨간 성’이라는 뜻의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모하메드 1세가 13세기에 건립하기 시작해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쳐 14세기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의 대부분은 14세기 유세프 1세와 모하마드 5세 때 만들어진 것이다.이 궁전은 성곽 외벽인 알카사바(Al Cazaba), 중앙의 무어인의 왕궁, 성곽 바깥의 여름 정원인 헤네랄리페, 이렇게 3지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성곽 외벽인 알카사바는 그라나다로 이슬람인들이 거점을 옮기기 전부터 있었으나 여러 차례 궁전을 증·개축하면서 알카사바도 망루를 30개까지 늘렸다. ‘빨간 성’이라는 이름은 이 알카사바의 벽담이 붉은 색을 띠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건축할 당시 불야성을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무어인의 왕궁은 1236년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아랍인들이 새로이 나자리 왕조를 세우면서 건축됐으며 헤네랄리페는 여름 별궁이 있는 곳으로 아랍어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끝이 없을 것 같던 가이드의 열정적인 안내도, 해가 지면서 끝이 났다. 석양으로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궁정은 평화와 아름다움의 극치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 뒤에는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고통과 죽음이 있었다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느껴졌다.전쟁과는 거리가 먼, 평화와 아름다움만이 존재하는 이곳에 ‘그 옛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라는 생각에 잠기면서 주변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노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스페인에서의 하루는 또 하나의 여운을 남기며 저물어가고 있다.글·사진 전광용 이오스여행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