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비구상 아우른 김훈 화백의 미학

세 때 만들어진 로마가톨릭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본적이 있는가. 색 유리 조각을 붙여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한 중세 미술의 상징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테인드글라스를 화려한 예술작품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면서 신도들에게 엄숙함과 경건함을 호소한다. 주체와 객체의 자연스러운 조화야말로 모든 예술가들이 꿈꾸는 최고의 예술 경지일 것이다.서양화가 김훈(84)의 작품을 보면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생각난 것은 왜일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그의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무엇이 어떻게 왜 됐는지 분석하지 말고 전체적인 느낌을 조망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로 꼽힌다. 일부에서는 그의 작품을 놓고 “구상이다” “비구상이다”라고 갑론을박하지만 그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김훈의 작품 세계는 구상과 비구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구분할 수 없다.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같은 맥락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구상과 비구상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그는 추상화의 대가로 인식하는 것이 더 편할 듯싶다. 이러한 평단의 평가를 묻자 그는 넌지시 웃기만 한다. ‘나는 묵묵히 내 길을 가고 있는데 왜 주변에서 제멋대로 재단하느냐’는 의미인 듯하다.그의 추상화가 인기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작품은 외관상으로는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주제가 작가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사물을 명료하게 묘사해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세계 유수의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 구성에 있다. 전체적으로 구도를 안정적으로 배치하면서 일정 부분 여백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갖는 매력 포인트다. 그러다보니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각 기호들이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정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어느새 평온해진다.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동양미가 물씬 담겨 있다. 바탕색을 어둡게 처리해 관객들의 시선을 그림 속 대상에 집중시키며, 동양적인 강렬한 색채를 많이 사용해 배경과 완벽한 조화를 꾀한다. 음침한 적벽돌 색 성당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환상적인 하모니라고 할까. 일부에서 그의 작품을 두고 ‘서정 추상화’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그의 작품 속에 표현돼 있는 원, 삼각형, 직선 구조물에는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고향(중국 푸순)의 풍경이 함축돼 있다. 마치 수묵화나 풍경화를 볼 때 느끼는 평안함을 그는 단순 도식으로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대신 거친 질감은 토속미로 승화시킨다.“나에게 자연은 곧 우주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이를 저 스스로에게 수없이 반문하면서 작품을 그리다보면 어느새 캔버스에는 자연과 나, 우리가 모두 들어가 있죠.”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하자 이 같은 선답(禪答)으로 대신했다. 그렇다고 김 화백이 처음부터 추상화에 매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작품은 구상에 가까웠다. 1973년 그린 ‘희망’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희망이란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 희망은 때론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낙네에게서도 나오며 아이를 안고 웃는 어머니의 웃음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시인 박노해처럼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저는 희망을 단순히 사람이 아닌 절대자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찾고 싶습니다. 절대자의 보호 아래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모습에서 희망이란 싹이 돋아나는 법이죠. 사람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희망이란 애당초 생각조차 하기 힘들게 마련입니다.” 4대를 이어온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기독교 사상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마음껏 풀어보고 싶어 한다. 그에게 토막 난 물고기는 죽음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는 새로운 생명이다.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그는 자신이 개발한 독특한 상형 문자를 그림 속에 그려 넣는다.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유학 시절 그는 일본 신제작파의 거두인 이노쿠마 겐이치로를 사사하면서 추상미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는 광복 이후 1949년 미국 공보관에서 근무하면서 그해 열린 제1회 국전에서 입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는 동안 그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추상적 기법을 동원해 그리는 데 열중했다. 그러던 1960년, 그는 돌연 유학을 결심한다. 1958년 뉴욕의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김흥수 등과 함께 초대되면서 그는 세계 현대미술의 변화를 체험했다. 당시 그의 눈에 비친 세계 미술은 충격 그 자체였다.1967년까지 그는 미국에서 현대미술의 급류를 직접 목도하면서 작품 영역을 더욱 공고히 구축해 나갔으며 귀국 즉시 김상유 김종학 배륭 유강렬 윤명로 등과 함께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는 등 한국 미술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이후 그는 1988년 다시 외국행을 결심해 미국 프랑스 등 현대미술의 중심지에서 세계적인 거장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내공을 쌓았다.그의 이름이 아직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대부분 해외에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65년 메리 워싱턴 현대미술전(Marry Washington Annual Exhibition of Modern Art)에서 대상, 1992년 모나코 왕실에서 주최한 미술대전에서 우수상(Prix de la Societe Eja)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최고의 미술 축제인 살롱 도톤에서 입상했다. 세월의 질곡 때문인지 노화백과의 인터뷰는 오래가지 못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라 허리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동석한 부인이 전한다.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화려했던 지난날의 찬사가 못내 아쉬운 듯 “마지막 혼을 다 발휘해 나에게 있는 예술적 기질을 다 태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의 길은 고단하다는 말처럼 그는 몸과 마음에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듯싶었다. 순수한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그에게 법, 제도 등 세상이 옥죄는 시련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진 노화백은 현실에서 희망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찾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