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르포 | 2007 바젤·제네바 박람회

람회가 왜 이리 중요할까. 스위스 시계의 특성에 기인한다. 스위스의 고가 시계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공 생산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연 5만 대 이내로 한정 생산되는 게 대부분. 이러다 보니 돈만 많이 준다고 제품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계 도소매상 등 바이어 입장에선 고객들이 원하는 제품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은 셈이다. 공급자도 소량 생산하는 제품들이 잘못된 수요 예측으로 공급 과잉되는 불상사를 바라지 않는다.바이어와 공급자의 입장이 반영돼 탄생한 게 스위스의 시계 박람회다. 박람회에서 시계 바이어들은 선주문을 내 올해 주문량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약간의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공급자들도 전시회를 통해 자사가 출시하는 신제품들에 대한 시장의 반응을 살피고 각 품목에 대한 구체적인 생산 규모를 결정할 수 있다.4월 12일부터 8일간 열린 바젤 시계박람회 ‘바젤월드 2007’은 1917년에 시작된 행사다. 스위스에 있는 몇 개의 주얼리 및 시계 제조업체들이 알음알음 모여 시작한 이 행사는 지금은 올해 기준으로 스위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홍콩 일본 등 아시아, 북미 등 45개국 2109개 기업이 참여하는 거대 행사로 성장했다. 행사장 규모도 전체 16만㎡(4만8000평) 크기에 6개의 대형 홀로 구성된다. 올해 관람객 수는 10만1700명.바젤 전시회를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전시장이라고 한다면 제네바의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SIHH·Salon International de la Haute Horlogerie)는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에서 톰 크루즈가 한밤 중 참석한 비밀 모임이라고나 할까.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는 1991년 시작돼 올해로 17년째를 맞았다. 피아제, 까르띠에, 보메 메르시에 등 5개 시계 브랜드로 시작된 행사는 지금은 16개로 늘어났지만 아직까지 외형은 바젤 박람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행사장 규모도 2만400㎡로 바젤의 8분의 1 수준.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바젤 전시회가 파텍필립, 롤렉스, 오메가 등 고급 브랜드부터 스와치, 캘빈 클라인 등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포괄하는데 반해 제네바 전시회는 오드마 피게, 아랑게 운트 죄네,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예거 르꿀뜨르 등 초호화 브랜드로만 엄선돼 있다. 또 바젤 전시회는 바이어는 물론 45스위스 프랑(약 3만4500원)만 내면 일반인들도 참석할 수 있는데 반해 제네바의 경우 철저히 자신의 영업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바이어, 기자, 개인 수집가들만 초대된다.바젤과 제네바 박람회를 각각 지탱하는 시계 재벌들의 자존심 싸움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다. 바젤 박람회의 핵심 전시장인 1관은 오메가, 브레게, 블랑팡, 글라쉬떼 등 스와치그룹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반면 제네바 박람회는 스와치그룹만의 잔치를 떠나 독자적으로 틀을 잡은 아랑게 운트 죄네, 까르띠에, 바쉐론 콘스탄틴 등 리치몬트그룹이 장악하고 있다.전문가들은 돈의 흐름은 이미 바젤에서 제네바로 넘어가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있다. 스위스시계산업협회(FHS)에 따르면 지난해 137억 스위스 프랑(약 10조4855억 원)으로 전년 대비 10.9% 성장한 스위스 시계 총 수출액에서 고가 시계의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당 3000스위스 프랑(230만 원)대 이상인 시계의 지난해 전체 수출 규모는 62억5000만 스위스 프랑으로 전년에 비해 34.7% 늘었다. 이에 비해 1500~3000스위스 프랑대의 시계와 500~1500스위스 프랑대의 시계는 각각 19.4%와 4.6% 증가했다. 500스위스 프랑을 밑도는 시계는 오히려 3.4% 감소했다.시계 수입 에이전시인 제이리교역 이상순 대표는 “2000년 초호화 브랜드인 오드마 피게가 바젤에서 제네바로 가는 등 제네바에 큰돈이 몰리는 분위기”라며 “IWC, 바쉐론 콘스탄틴이 수십억 원대의 마케팅 행사를 벌이는 것도 이 같은 배경”이라고 설명했다.바젤·제네바 박람회, 스위스 최대 행사 실감출국하기 이틀 전인 4월 11일. 여행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님, 직항선은 도저히 안 풀리네요. 웬만하면 출발 2∼3일 전에 자리가 생기는데 이번엔 뭔 일이 있는지 지금까지 대기자가 20명이나 되네요.”전시회가 열리는 바젤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1시간 거리인 취리히에서 자면서 매일 아침 통근 취재를 작정했는데 그나마 취리히까지의 직항 비행기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바젤 및 제네바 박람회가 스위스 최대 행사라는 게 헛된 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결국 오전에 인천에서 출발해 파리를 경유한 뒤 취리히로 떨어지는 18시간의 비행 여정을 택했다.스위스 박람회 취재는 13일 토요일 밤 취리히에 도착, 이튿날인 14일부터 시작됐다. 취재는 바젤에서 이틀, 제네바에서 사흘간 각각 진행됐다. 바젤에서 이틀은 가뜩이나 짧은 일정에 숙소와 전시장과의 통근 시간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전체 전시관이 6관인 데다 참여 업체만도 2100여 개가 넘어 이틀 동안 모든 업체들의 신제품을 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것.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가장 중요한 전시관인 1관에 있는 30여 개의 부스를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방문하고 설명을 들었다. 또 오메가 등 주요 브랜드의 최고경영자(CEO)를 인터뷰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이틀 후 방문한 제네바는 참가 업체 수가 16개로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다. 특히 리치몬트그룹의 까르띠에, 바쉐론 콘스탄틴, 예거 르꿀뜨르 등의 제조 공장을 방문하고 IWC의 연극 ‘레오 앤 리자’ 행사 등을 참관, 더 심층적인 취재를 할 수 있었다. 바젤부터 들고 온 각 브랜드별 브로셔와 CD 묶음은 결국 20여㎏ 무게의 고속 우편물인 TNT에 실어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