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1시가 좀 지났을까. 온 이스탄불 시내에 노랫소리 같은 기도문이 요란히 울려 퍼진다. 이스탄불 시내 2800여 개의 모스크에서 하루 다섯 번 일제히 울려 퍼지는 기도, 에잔. 때론 육성으로, 때론 스피커의 힘을 빌려 시내가 떠나갈 듯, 마치 우리네 민방위 훈련을 떠올리는 이 상황은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의 귀와 발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다. 터키 제1의 도시, 이곳 이스탄불을 말해주는 매력은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독특한 모슬렘 문화와 동서양 문화의 조화, 그리고 술탄과 그를 중심으로 꽃피웠던 문화. 이 가운데 이방인들에게는 신비로움의 존재이자 세계를 경영하던 ‘신’처럼 추앙받던 술탄은 이스탄불의 역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중심으로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유럽 쪽에 자리한 구시가에서도 중심가로 통하는 ‘술탄 아흐멧(Sultan Ahmet)’ 지역에 이스탄불의 주요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야 소피아, 술탄 아흐멧 1세가 지은 블루 모스크, 고대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이었던 히포드롬 등이 몰려 있고, 아야 소피아에서 불과 2분 남짓 떨어진 곳에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톱카프 궁전(Topkapi Sayayi)을 만나게 된다. ‘대포의 문’이라는 의미의 이 궁전은 원래 보스포러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설치해 이름 지어졌다. 술탄 메흐멧 2세가 1467년 완성한 이 궁전은 이후 400여 년간 증축을 계속,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궁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됐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술탄의 영화를 짐작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성벽을 지나 공원에 온 듯 우거진 녹음(제1정원) 사이의 길 끝에서 동유럽의 성문을 본뜬 문을 넘어서면 중세 이후 유럽을 동경과 시샘에 물들였던 제국의 비밀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특별한 장식은 없지만 탁한 회색 건물 외관은 단단하면서도 또 그만큼의 위엄을 가득 전하고 있다. 마침 궁전을 찾았을 때 하늘이 잔뜩 흐렸던 때문도 있겠지만 북적이는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는 듯 궁전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장중한 색감과 무게감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제2정원을 천천히 건너 ‘지복의 문’을 넘으면 본격적인 술탄의 영역으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마침 이스탄불을 찾았을 때가 5월이어서 그런지 곳곳에 핀 각양각색의 튤립이 눈길을 끌었다. 흔히 튤립은 네덜란드의 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터키의 국화다. 무역을 통해 네덜란드와 유럽에 튤립을 전했던 건 터키였음을 터키인들은 두고두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이 이스탄불의 거의 모든 정원과 공원에는 다양한 색깔의 꽃잎을 자랑하는 튤립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튤립과 네덜란드 간의 오랜 등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쉽게 바뀌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지복의 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크지 않으면서도 장식성이 뛰어난 방, 접견실이 있다. 이곳에서 술탄은 외국 대사들이나 상소를 올리러 찾아 온 일반인들을 맞았다. 대사들이야 가까이서 알현할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접견실 반대쪽의 철제 격자창 너머에서 술탄에게 고해야 했다. 암살 위협 때문이었다. 게다가 대사들, 혹은 고관들과 회견할 때는 접견실 밖의 수도를 반드시 틀도록 했는데, 이는 누군가 몰래 엿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궁전의 첫 관문부터 술탄과 그를 둘러싼 궁전의 숨 막히는 순간들이 생생히 전해졌다.제3정원을 지난 건물의 여러 방들은 술탄의 보물, 유물, 무기, 예술 작품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의 전시품들이야말로 제국의 호화로움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보물’들로 취급된다. 헝가리에서 들여온 1000개의 다이아몬드와 48kg의 금을 녹여 만든 거대한 촛대, 아이 주먹만 한 에메랄드 3개가 박힌 황금 단검, 금화 8만 개를 녹여 만들었다는 왕좌, 에메랄드와 각종 보석, 금의 찬란한 빛이 조명을 받아 지금도 그 빛을 잃지 않은 함 등의 전시물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사를 아끼지 않는다. 키프로스에서 발견됐다는 세례자 요한의 두개골과 팔 유골은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유물이다. 여기에 86캐럿에 달하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49개의 다이아몬드가 감싸고 있는 ‘스푸니 다이아몬드(Spoony Diamond)’는 톱카프 궁전 최고의 전시물로 통한다. 궁전을 둘러보는 이방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은 단연 ‘하렘(Harem)’이다. 왕의 후궁들이 술탄에 버금가는 호사를 누리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유럽에 알려진 후, 하렘은 유럽과 세계에 터키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과 에로티시즘을 낳은 발단이 된 곳이다. 톱카프 궁전에는 이 하렘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물론 400여 개나 되었던 과거의 거대한 규모와는 달리 지금은 상당히 축소된 규모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하렘은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다.궁전 왼쪽 하렘의 문을 지나면 이미지에 어울리게 어둠침침한 긴 통로가 시작된다. 하렘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은 흑인 경비병들의 처소. 이 하렘에서 여인들의 시중을 들던 남자들은 술탄 이외는 모두 ‘거세’를 당한 채 머물렀다. 경비병도 예외는 아니어서 먼 아프리카에서 데려와 거세한 흑인들로만 구성됐다고 한다. ‘유닉스(Unix: 컴퓨터 OS의 하나인 유닉스는 이 이름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다)’라 불리는 이들은 왜 굳이 흑인이었을까. 동행했던 터키인 일마즈는 거세가 완벽하게 되지 않아 후궁들과 정을 통했을 경우 후궁이 낳은 아기의 피부색으로 ‘불충’을 쉽게 판단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경비와 식사 시중, 후궁의 말벗 등 많은 역할을 담당했었다.하렘에는 숙소와 왕의 휴식처, 하맘이라 불리는 목욕탕, 정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후궁과 왕비, 그리고 술탄이 머무르던 방들은 저마다 화려한 타일과 모자이크로 단장되고 벽난로를 일일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어디나 아름답게 꾸며진 방을 만나지만, 왕비나 후궁들의 방은 채광이 거의 없이 어두운 반면, 술탄이 사용하던 의식 홀과 음악 홀 등은 바깥의 빛을 가득 끌어들이는 구조라는 점이다. 하렘의 여인들을 밖에서 함부로 볼 수 없게끔 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래서 높다란 천장에 새겨진 이슬람 특유의 문양과 벽의 타일 장식 등은 술탄의 방에서 자연 채광 덕에 그 화려함을 제대로 선보인다. 왕자와 공주가 교육을 받던 방은 그들의 축복받은 미래를 암시하듯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민 창으로 화려함을 더한다. 술탄은 하렘에서 여인들의 춤과 음악을 감상하고 가족들과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의 휴식의 끝은 하맘이라는 터키 전통 목욕탕으로 이어졌다.이미 사용하지 않은 지 20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곳임에도 비가 와서 서늘한 바깥의 날씨와는 달리 온기가 서려 있는 하맘은 왕이 사우나와 마사지, 목욕 등 터키의 고급스러운 목욕 문화로 피로를 풀던 공간이다. 사방은 온통 대리석으로 짜여 있고 수도꼭지 등은 화려한 금장이 입혀져 왕의 호사를 이어간다. 사실 터키인들이 우리에게 못내 서운해 했던 것이 ‘터키탕’이라는 과거의 비속어 때문이었다. 우리식의 ‘터키탕’과는 달리 진짜 터키탕은 터키인들에게 일상적이면서도 전혀 퇴폐적이지 않은, 로마의 목욕 문화를 오히려 건전하고 고급스럽게 발전시킨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이기도 했으니 그 섭섭함이야 오죽했을까. 궁전의 하맘을 둘러보던 중년의 한국인 여행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 터키탕이 아니네”라며 흘리듯 한마디 남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하렘 실체는 유럽인들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왕조 국가라면 어디나 있었던, 후궁들의 처소와 다르지 않았으며 남녀를 구분하는 모슬렘의 율법에 따라 궁 안의 모든 여인들 즉 왕비와 모후, 공주들까지도 이곳 하렘에 머물렀다는 것. 거기다 여인들의 교육과 기예를 담당하던 곳이었는데, 하렘에서의 생활은 당시 모슬렘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었다. 구성원 역시 정통 터키 여인은 40%에 불과했고, 제국이 점령한 외국에서 데려온 이들이 나머지를 차지했는데, 그 가운데는 서남, 중앙아시아와 중국, 러시아와 헝가리 등에서 오거나 프랑스 등에서 데려온 여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슐레이만 대제의 비 가운데는 ‘록세라나’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러시아 여인, 하세키 휴렘도 있었으니, 하렘은 단순히 여인들의 처소라기보다는 유럽과 아시아를 두루 경영하던 술탄의 영향력과 이스탄불의 국제적인 수준을 말해주는 실마리 가운데 하나로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미로처럼 복잡해진 하렘을 나와 제2정원 한쪽의 기다란 건물로 향했다. 건물 위에 줄지어 세워진 굴뚝으로 봐서 쉽게 주방임을 짐작할 수 있는 곳. 평소 술탄과 더불어 많게는 60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던 궁전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제2정원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연회를 ‘처리’하던 공간으로, 이곳 역시 궁전의 규모와 부귀를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 공간 가운데 하나다. 큰 연회의 경우 8000여 명의 손님이 동시에 몰릴 때도 있었는데, 이때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부두에서 실려 온 진귀한 식재료들을 60여 명의 요리사가 각각 3~4명의 보조 요리사를 거느리고 24시간 요리를 해냈다고 한다. 이 공간 역시 과거의 조리대, 연기로 그을린 천장의 환기창 등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박물관이 돼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동서양의 도자기 문화를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술탄들이 애용했던 중국의 청화백자와 금은 식기류와 조리 도구, 찻잔, 주전자 등이 풍부하게 전시돼 있다. 실크로드의 끝에 이스탄불이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의 도자기 문화가 유럽으로 전파됐다는 역사적 사실이 생생히 다가오는 공간이다. 뒷면을 화려하게 장식한 은제 거울에는 기도 때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방의 거울을 모두 뒤집어 놓은 때문에 그 뒷면의 장식도 적잖이 신경 썼다는 이슬람의 문화가 더불어 담겨 있다.동서양을 아우르던 제국의 위세를 확인하는 공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술탄들은 궁내에 ‘엔데룬’으로 불리는 대학을 두어 이를 활용했는데, 이곳에서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던 이슬람의 수학, 지리, 천문 등을 가르쳤다 한다. 이곳의 학생들은 대부분 유럽이나 아시아인들이었다. 가장 번성했을 때는 36개 나라를 다스린 때문에 각 나라의 대사나 관료들과 술탄이 소통하기 위한 통역관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그래서 아예 이런 대학을 두고 각 나라에서 뽑혀온 이들에게 이슬람교과 제국의 예법을 가르친 뒤 관료로 임명, 궁내에 머무르게 하면서 술탄의 세계 경영을 돕게 했다. 그들 가운데는 폴란드와 러시아 등에서 건너온 이들도 있었다.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식으로 유명한 관용과 포용 정책이 담겨 있는데 다른 나라를 점령, 통치하더라도 그들의 말과 문화는 그대로 보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술탄들이 종교의 자유도 허락했다. 물론 중앙 관직에 진출하거나 세금 우대를 받으려면 모슬렘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에 많은 점령지 주민들은 개종을 택했지만 그 자체가 의무 조항은 아니었다.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모국어를 그대로 쓸 수는 있었지만 말 그대로 ‘대처’로 나아가 큰 장사 한 번 해볼 요량이라면 터키어가 훨씬 편했기에 자연히 터키어를 배우는 점령지 사람들이 늘어났다. 제국의 점령지 언어를 보장했던 이유에서인지 18, 19세기에 이를 즈음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세계 언어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한때 프랑스어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져 신식 군대에서도 프랑스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칠 정도였다. 포용 정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왕의 최측근 친위대로 제국 건설의 일등 공신이었던 부대 ‘예니체리’의 구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술탄은 점령지의 기독교 사내아이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을 선발, 이스탄불로 데려와 최고 수준의 교육을 통해 정예 부대를 양성했다. 이들은 웬만한 관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높은 급여를 받으며 차별화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 거처하는 영예도 누렸는데, 톱카프 궁전 정문에서 시작되는 제1정원은 이들이 주둔하거나 훈련하던 곳으로 활용돼 일명 ‘예니체리의 정원’이라 불렸다. 동서양 어디에서도 점령지의 시민들을 이토록 폭넓게 등용하거나 제국의 일원으로 포용하며 과감하게 국가를 경영했던 왕조는 드물다. 오스만 제국이 세계의 주요 국가로, 이스탄불이 파리 등과 더불어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로 대접받았던 과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모두 22명의 술탄들이 머물렀던 톱카프 궁전은 1856년 술탄 압둘 메지트 1세가 해협 건너 신시가에 지은 베르사유풍의 신식 궁전, 돌마바흐체로 처소를 옮기면서 그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유는 간단했다. 점점 위세가 꺾이는 오스만 제국을 보다 서구화된 모습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톱카프에서 떠난 술탄은 기력을 다해, 결국 청년 투르크당의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패전 등을 거치며 종말을 겪게 된다. 마지막 술탄은 돌마바흐체 궁전과 이어진 바다를 통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고 이와 대조적으로 케말 파샤는 터키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 여태껏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아타튀르크 부럽지 않은 존경과 추앙을 누렸던 술탄의 흔적은 톱카프 궁전 곳곳에 남아 터키의 신비를 찾아 온 세계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터키인들은 아타튀르크라는 영웅을 받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술탄의 영광으로 관광 자원을 삼는, 과거와 현재의 묘한 동거 속에서 실속을 챙기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