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의 축제’는 올해도 계속됐다. 거기엔 흥이 있었다. 어울림이 있었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그득했다. 모두가 들떴으며 약간은 흥분했다. ‘버핏의 신도’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에 대한 자부심도 넘쳐났다. ‘자본주의의 살아있는 교육장’이라는 벅셔해서웨이의 주주총회. 인구 41만 명의 중부 소도시인 네브래스카의 오마하에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2만7000여 명의 주주들로 북적였다. 한 주에 1억 원(11만 달러, A주식 기준)이 넘는 벅셔해서웨이의 주식을 가진 주주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부자들. 이런 부자들은 체면도 잠시 벗어 놓았다. 그들이 모시는 ‘오마하의 현인(Oracle of Omaha)’의 말 한마디에 열광했다.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도대체 무엇이 그리 즐거운 걸까. 주주가 아닌 이방인으로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참석 자체만으로도 즐거워했다. 17년째 참석한다는 노부부. 아들 손을 끌고 오다가 작년부터는 손자 손을 잡고 온다는 할아버지. 1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며 독일에서 날아온 아주머니. 버핏의 투자 철학을 직접 듣기 위해 휴가를 내고 왔다는 월가의 펀드매니저. 영문도 모른 채 부모 손에 이끌려 왔지만 분위기가 마냥 즐거운 어린이들.이 신도들 앞에 워런 버핏은 올해도 건재를 과시했다. 올해 나이 76세. 이제는 기력이 떨어질 만도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더 젊어졌다. 6시간에 걸친 주주와의 일문일답을 특유의 재기 넘친 화술로 이끌더니만,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와 함께 탁구를 치고 카드게임을 하는 ‘팬 서비스’도 연출해 냈다.그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주주들 앞에 버핏은 올해의 화두를 제시했다. 다름 아닌 ‘예기치 못한 리스크 관리와 글로벌 투자 확대’였다. 가치 투자의 대가답게 그는 “앞으로 발생할 리스크는 이전에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리스크는 금융공학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만큼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투자의 귀재는 그렇지만 마냥 움츠러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년에 시작한 글로벌 투자를 올해는 더욱 확대할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미리 대비한 위험은 위험이 아니라는 자신감을 깔고 있다고나 할까. 그가 매년 강조하는 투자의 근본은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에 대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살아가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주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결국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 바로 이것이 ‘버핏의 신도들’을 열광시키는 매력이었다.주주총회 전날인 5월 4일 오후 6시. 오마하 파크웨이에 있는 보석가게 보세임(Borsheim). 5000여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뜨겁다. 주총 전날 열리는 전야제인 칵테일 파티다. 무료로 식사와 주류를 제공하지만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릴 수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이방인에게만 그런 걸까. 엄청나게 비싼 주식을 가진 부자들이지만 ‘공짜 저녁’을 먹기 위해 1시간이 넘게 줄을 선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주주는 “줄 서는 것도 즐거움”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칵테일 파티엔 해후의 반가움이 넘실댄다. 1년 동안의 안부를 묻거나 벅셔해서웨이의 지난 1년 동안의 성과를 확인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젊은 주주들은 버핏의 후계자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다. 헬스케어 업체의 경영진으로 일하다 은퇴한 윅 라인(61) 씨가 젊은이들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나는 버핏을 정말 정말 존경한다. 버핏이 있어서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토론 끝’이었다. “버핏”이라는 연호와 박수갈채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칵테일 파티가 세계 최대의 보석 매장이라는 보세임에서 열린다는 점. 10만 달러가 넘는 시계 등 비싼 보석이 즐비한 매장이다.매장에서는 ‘주주 특별세일’을 내걸며 30% 파격 세일을 실시한다. 주주들로선 싼 값에 비싼 보석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보세임의 1년 매출 중 20%가량이 주총 기간에 이뤄진다고 한다.다음날인 5월 5일 새벽 5시. 주총이 열리는 오마하 컨벤션센터인 퀘스트센터. 주총장이 7시부터 문을 여는 데도 벌써부터 사람들이 넘쳐 난다. 여기저기 침낭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밤샘을 한 사람들도 상당하다. “버핏을 보고 싶어 새벽 4시에 나왔다”는 주주들이니 자칫 버핏에 대해 부정적인 말이라도 할라치면 돌팔매라도 맞을 분위기다.오전 7시. 주총장의 문이 열렸다. 정확히는 주총장 옆의 전시장 문이 열렸다. 전시장은 벅셔해서웨이 자회사 70여 개가 상품을 전시하고 싸게 파는 곳이다. 우르르 몰려든 주주들은 전시장 첫머리에 자리 잡은 우표 판매대에 길게 늘어선다. 버핏과 부회장인 찰리 멍거의 얼굴이 담긴 우표를 사기 위해서다. 한 세트에 20달러나 하지만 줄은 꼬리를 문다.오전 7시 20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한쪽에서 “와”하는 환호성이 터진다. 버핏이다. 드디어 오마하의 현인이 모습을 보였다. 백발에 뿔테 안경. 꾀죄죄한 넥타이.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만 없었다면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다. 주주들에 둘러싸여 악수하고 손을 흔드는 그는 정말 행복한 모습이다. 매장을 돌다가 버핏은 5인조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는 소규모 무대에 올랐다. 그리곤 자신이 좋아하는 유크렐레(기타 모양의 하와이 현악기)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주주들의 환호에 묻혔지만 빼어난 유크렐레 소리는 전시장을 감싸고돌았다. 그 자신이 축제의 시작을 노래로 알린 셈이다.오전 8시 30분. 주주총회가 시작됐다. 전통적인 1시간짜리 영화 상영이 먼저다. 거대한 체육관의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다. 올해의 주제는 ‘챔피언처럼 투자하라(Invest like a champion)’.팝음악과 미식축구, 프로농구, 코카콜라를 소재로 76세의 버핏이 유니폼을 입고 등장한다. 미식축구 감독으로 축구팀을 승리로 이끈 버핏은 농구 유니폼을 갈아입고 미국의 농구스타와 1 대 1 농구경기를 한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지지 않는다. 오히려 체육관 바닥에 떨어진 1달러짜리를 줍는 여유마저 보인다. 영화에서 그는 챔피언이었다. 투자 세계에서 챔피언인 것처럼 말이다. 챔피언처럼 투자하라는 메시지가 전율처럼 몸에 다가온다.오전 9시 30분. 영화가 끝나자 체육관의 불이 꺼졌다. 저 멀리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더니만 노인 둘이 자리를 잡는다. 버핏과 멍거. 오늘날의 벅셔해서웨이를 있게 한 주인공이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코카콜라 몇 캔과 물. 그 흔한 자료도 없다.“안녕하세요. 지난 1분기 벅셔해서웨이 실적부터 보고드립니다. 순이익은 25억9500만 달러로 작년 동기(23억1300만 달러)보다 12% 늘었습니다.” 버핏의 첫마디는 이랬다. 그 다음은? 당연히 환호와 박수였다. 좋은 성적표를 보고하고 주주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는 경영자. 이 자리에서 그 만큼 행복한 사람도 없을 성싶었다.첫 번째 질문. “요즘 사모 펀드가 휩쓸고 있습니다. 돈이 사모 펀드에 몰리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버핏은 제법 진지했다. 즐겨하는 유머도 생략한 채 “국채와 하이일드채의 수익률 차이라고 봅니다. 갈수록 격차가 좁혀지고 있어서 (중략) 사모 펀드의 인기도 시들해질 것으로 봅니다. 아울러 차입을 좋아하는 사모 펀드의 위험성도 깨달아야 하고요. 찰리(부회장인 멍거의 이름).” 5분여 동안 청산유수처럼 대답한 버핏은 마이크를 멍거 부회장에게 넘겼다. “맞는 말씀입니다. 정신 차려야지요.” 멍거의 대답은 10초도 안 걸렸다.질의응답은 이랬다. 9시 30분에 시작한 질의응답이 오후 3시 30분까지 지속됐지만 두 노인들의 대답하는 스타일은 일관됐다. 버핏은 특유의 재치와 유머와 지식을 섞어가며 5~10분 동안 상황을 설명했다. 그 해박함과 정확함에 주주들은 발을 구르면 좋아한다. 멍거는 달랐다. 버핏보다 여섯 살 많은 83세인 멍거는 내내 뚱한 표정이었다. 답변을 끝낸 버핏이 “찰리?”하고 마이크를 넘기면 한두 마디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나는 몰라요.” “정직과 윤리가 최고죠.” “머리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합니다.”두 노인은 또 만물박사였다. 쏟아지는 질문은 모든 영역을 넘나들었다. “스톡옵션 파동은?” “경기는?” “이민자들은?” “대학교육제도는?”이라는 끝도 없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철학과 생각을 얘기했다.한마디로 두 노인이 이끌어 가는 ‘투 올드맨 쇼’였다. 두 사람은 마치 만담을 하듯이 북 치고 장구 치며 좌중을 웃기고 울렸다. 그리고 이 ‘투 올드맨 쇼’를 보는 것만으로도 주총에 참석한 비행기 값은 빠지지 않을까 싶었다.중간에 예상됐던 질문이 나왔다. “중국 석유회사인 페트로 차이나의 모회사는 인종 살상이 벌어지고 있는 다르푸르 사태가 발생한 수단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평소 벅셔해서웨이의 윤리 규범에 비춰 볼 때 페트로 차이나 주식을 계속 갖고 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매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장내에 “우”하는 야유가 메아리쳤다. 버핏은 “우리는 페트로 차이나라는 회사를 보고 투자합니다. 모회사를 보는 게 아니죠. 다르푸르 사태에 대해선 분명 우려하지만 그것이 투자를 철회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는 말로 설득했다. 순간 영상물이 올랐다. 전에 페트로 차이나 주식 처분에 대해 주주들을 대상으로 찬반 의견을 들은 결과 98.2%가 반대한다는 거였다. 말하자면 100명 중 98명이 버핏의 의견을 지지한 셈이다. 옆에 있는 주주에게 “다르푸르 사태는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버핏이 한다면 한다”고 쏘아붙인다. 대단한 ‘신도’고, 대단한 ‘교주’다.또 다시 예상된 질문이 나왔다. “지금 후계자인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선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쯤 CIO자리를 물려줄 생각인지요.” 그러나 질문자는 질문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언제쯤 물러날 생각이냐”는 말이 나오자마자 주주들의 야유가 질문을 가로 막았다. 누가 CIO가 되느냐에 관심은 많지만 언제까지나 버핏이 CIO를 했으면 하는 게 주주들의 바람이었다. 이들의 야유는 “내가 옆에서 보기에 버핏은 앞으로도 수십 년은 지금처럼 살 것 같다”는 멍거의 답이 나오고 나서야 진정될 정도였다.예상치 못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질문권을 얻은 한 아주머니가 인디언 전통 복장을 하고 질문대에 섰다. “벅셔해서웨이 계열사가 개발하고 있는 오리건 주의 수력발전소 때문에 인디언 보호구역 내 물이 말라 송어들이 사라져 생계 수단을 잃었다”며 “댐을 헐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조용한 박수가 일었다. 이쯤 되면 천하의 버핏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버핏은 “그 문제는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 지역 관할 관청이 결정하도록 계약이 돼 있습니다. 그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버핏다운 답변에 우레와 같은 갈채가 이어졌다.“켄터키 주에서 온 소녀입니다. 이제 열 살이고요. 버핏 할아버지처럼 꾸준히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한 여자아이가 제법 돌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주주들은 “와”하고 폭소를 터뜨렸지만 버핏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 마이크를 잡았다.“만약 열두 살이나 열세 살만 돼도 신문 배달을 추천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고교를 졸업하기 전에 20가지 정도의 사업을 시도했는데, 그중에 핀볼 기계가 가장 수익이 좋았어요. 그걸 추천하기는 그렇고.(웃음) 지금 너무 어리니까 돈 버는 방법에 대해 부모님이나 어른들과 꾸준히 대화하세요.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돈을 지불받을 수 있는 일을 알아보는 게 좋을 듯하네요. 절대 빚은 지지 말고.”투자 비법은 간단했다. ‘어릴 때부터 시작해라. 꾸준히 공부하고 고민하라. 빚지지 말라’였다. 버핏의 마이크를 넘겨받은 멍거의 대답은 더 명료했다.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얻으세요. 신뢰를 얻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겁니다.”버핏은 큰돈을 벌어 자선 사업을 꿈꾸는 대학생이 ‘부자 되기 노하우’를 묻자 “젊었을 때부터 로드맵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분명한 로드맵을 가지고 계속 시장의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며 “기회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조언했다. 주총은 ‘투자 토크쇼’였고, ‘투자 교육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