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동녘 창(窓)을 비추면 산과 들에는 엷은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새소리는 한결 맑아진다. 꽃이 몽우리 지고 동면에서 기지개를 켜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과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생명의 경외(敬畏)를 일깨워준다. 이 계절의 신비를 완벽하게 묘사한 예술의 시대가 있었으니 그 시대를 아르누보(Art Nouveau), 즉 ‘새로운 예술’이라 일컫는다. 거의 20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눈부신 프랑스의 모던 스타일인 아르누보 양식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목도(目睹)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어나다’라는 말처럼 아르누보를 적절하게 표현한 말을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아르누보의 모든 것들이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렇다.아르누보 사조는 대략 1884년부터 시작돼 1918년까지 풍미했다. 몽마르트 언덕에는 카바레가 서고 거리에는 알퐁소 뮈샤가 그린 포스터가 화려하게 나붙었다. 해질녘 가스등에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이국적인 풍모의 사교계 인사들은 서둘러 집을 나선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 속에 생생하게 묘사돼 있듯이 1889년 개장한 물랭루즈에서는 캉캉 춤을 선보였고 파리는 열광했다.아르누보가 탄생시킨 디자이너빅토리아 시대 중반을 넘기면서 절정에 이른 산업 혁명은 시민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변화를 촉구했다. 중세의 유산으로 확고하게 유지해 왔던 길드가 해체되기 시작하고 길드를 중심으로 지위를 누려왔던 장인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 기계로 만들어진 세련되지 못한 제품들은 질적으로 저하되고 수공 기술의 전통은 단절돼 갔다. 더욱이 이 시대에 만연된 자유주의는 제조업자의 임의대로 질 낮은 제품 생산이 가능하게끔 했다. 그 결과 조악한 재료와 낮은 기술이 산업계를 지배하게 돼 모든 공예품들은 조잡한 과잉 장식의 경향을 보였는데 길드가 지배했던 중세 사회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시대의 이단자이자 근대 디자이너의 아버지 윌리엄 모리스는 옥스퍼드 출신으로 건축과 신학, 회화, 시 등을 섭렵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환경을 대중이 함께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골몰한 인물이다. 부르주아 가문의 출신이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예술 활동에 접목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는 직접 모리스 회사를 차린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보여준다.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당연히 자연을 모티브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재 자체의 질감을 나타내고 우아한 소박함을 목표로 가구와 책, 텍스타일과 벽지 등을 디자인했으며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벽지 디자인은 이때 만들어진 패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 운동을 아트 앤드 크래프트(Art & Crafts Movement) 사조라 부른다. 특히 벨기에의 헨리 반 드 벨데(Henry Clemens van de Velde), 빅토르 호르타(Victor Horta)와 같은 이들이 모리스의 이상에 동감했으며 이들의 건축과 가구 디자인은 유럽으로 널리 퍼져가면서 새로운 예술 양식으로 나타난다. 아르누보 출현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파리에서 피어난 아르누보파리 특유의 안개비가 흩뿌려지는 어느 오후, 물기를 머금은 환상의 실루엣으로 붉게 피어오르는 한 송이 튤립을 발견했을 때 여행자에게 그것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이 꽃송이는 한 편의 명화의 배경처럼 파리를 더욱 파리답게 만드는 메트로, 즉 지하철역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1백여 년 전,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엑토르 기마르가 장식했는데 기마르는 벨기에 건축가 벨데와 호르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프랑스는 사실상 아르누보를 본격적으로 꽃피운 곳이다. 도처에 그 유산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앤티크 숍을 둘러보면 풍성하게 진열된 다양한 카메오 램프와 가구 등에서 아르누보 시대를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인들을 열광시킨다. 그 이유는 아르누보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회화, 그래픽, 유리 실내 장식에서 나타난다. 특히 유리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 낭시의 갈레와 돔, 뉴욕의 티파니 같은 디자이너의 작품들은 경매장 호가가 끝 모르게 치솟고 있다. 이들이 당대를 대표하는 유리 디자이너들이다.‘아르누보’라는 용어의 탄생 역시 프랑스에서 유래한다. 벨데의 이론과 작품을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은 화상(畵商)인 사무엘 빙(Samuel Bing)이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화상으로 활동하다 1871년 파리로 옮겨온다. 1875년에는 아시아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일본과 중국 등의 예술 세계를 널리 소개했다. 그리고 프로방스 가(街)에 ‘아르누보’라는 이름의 갤러리를 열었을 때, 독일의 미술 평론가인 마이어 그레페(Meier Graefe)의 협력을 얻어 상점의 실내 장식을 벨데에게 위촉한다. 벨데는 파리에 초청을 받아 네 개의 방을 참신하고도 힘찬 아르누보 스타일로 꾸민다. 사무엘 빙의 신선한 시도는 적중해 파리에서 빠르게 호평을 받았으며 곡선을 사용한 장식의 유행은 프랑스에서 유럽 전체로 동시에 퍼졌나갔다. 아르누보라는 이름과 함께.라울 라르슈(Raoul Larche)는 너울거리는 댄서를 주로 조각으로 표현한 아르누보를 상징하는 조각가다. 이 램프는 신약 성서에 헤로데의 딸로서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해서 유명한 춤추는 살로메를 브론즈로 표현했다. 앤티크 마켓에서는 이와 비슷한 조각들이 거래되고 있기도 하다.약 3500달러에 거래된다.1 낭시파를 창설한 갈레의 글라스 쿠페(coupe). 에나멜과 인그레이빙 기법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수공예의 완성미를 높였다. 특히 일본 수묵화의 영향을 엿보이게 하는 부분과 이슬람의 영향도 함께 느껴진다. 곤충, 꽃을 통해 자연을 사실대로 묘사하고 있다. 가격은 35000달러 정도에 거래된 바 있다. 2 1900년대의 랄리크와 함께 주얼리를 디자인한 에드워드 콜로나(Edward Colonna)의 이 작품은 바로크 진주를 통해 부정형 미학으로 아르누보적인 요소들을 디자인 모티브로 하고 있다.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주소재로서 약 5만 달러를 호가한다. 3 갈레가 즐겨 그렸던 가까운 마을의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꽃병. 갈레는 아르누보의 중심에서 가구와 도자기 등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특히 파리에 낭시박물관이나 오르세에서 볼 수 있듯이 화려한 유리를 통해 아르누보의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조각가로서, 너울거리는 댄서의 정수를 보여준다. 3500달러 정도를 호가한다.4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주얼리 디자이너인 랄리크는 특히 비싸지 않은 소재를 사용해 훌륭한 가치를 만들어냈다. 런던에서 고등학교 시절 공부한 적이 있는데 이때 모리스의 아트 앤드 크래프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와 뛰어난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대중이 사용할만한 재료를 주얼리에 사용하는 것으로 르네상스인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5 아르누보 시대의 보헤미안 글라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뢰츠는 미국의 티파니 글라스를 능가하는 화려한 작풍을 일구어냈다. 무지개 빛깔의 유리 표면에 은빛 메탈을 꽃으로 표현해 이국적인 요소들로 가득 채운 이 꽃병은 매우 이례적인 디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