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쭉한 목청에서 뿜어져 나는 진실된 가락의 힘
전보다 희끗한 머리가 많아지고, 깊게 파인 주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하회탈처럼 얼굴 가득 퍼지는,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만은 그대로다. 4년만의 재회다. 기자가 장사익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시절 강의실에서였다. 교수님과 친분이 있는 유명 인사들을 초대해 일일강사로 강단에 세웠던 전공 시간. 학생들은 유명 인사들을 작은 강의실에서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들떠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장사익이라는 이름 석자는 생소했다. 힙합과 랩에 젖어있는 세대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강단에 선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지가 무슨 강의를 하겄어유. 노래나 한 판 불러 볼까유”라고 했다. 이어지는 노랫가락들. 음향시설이 전혀 돼 있지 않은 교실에서 무반주로 불러 제끼는 그의 노래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를 읊조리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높은 고음으로 시원스럽게 질러대는 탁성은 듣는 이들에게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한 느낌을 줄 만큼 파워풀했다. 길고 긴 노래로 강의 시간을 꽉 채운 장사익. 실로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이라 칭할만했다. 기자는 그 감동을 장문의 리포트로 풀어냈고, 여운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좋은 인연은 꼭 다시 만나게 되는 법이죠. 저와 이렇게 재회하게 된 것도 모두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때 그 강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나는군요.”잠시 추억에 젖었던 그는 조용히 국화차를 우려냈다. 투박한 질그릇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미색의 국화차 향기가 응접실 전체에 그윽하게 퍼졌다. 그의 집은 상명대 옆 홍지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샛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자그마한 단독주택이 나온다. 6년 전부터 살고 있는 그의 보금자리다. 집 앞에는 소박한 정원이 있는데, 서정적인 클래식 선율이 어디선가 지속적으로 들려왔다.“라디오에 자동 타이머를 설치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클래식 방송을 틀어놓지요. 뜰에 있는 나무와 풀, 곤충, 그리고 가끔 놀러오는 산짐승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거예요. 좋아들 해요. 꽃도 더 예쁘게 피는 것 같고… 자연을 보듬어주는 느낌이 들어 뿌듯하죠. 어차피 사람도 자연이니까요.”고향의 자연을 못 잊은 때문이리라. 그는 충남 광천 시골에서 태어나 돼지를 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시골의 드넓은 벌판은 모두 그의 무대였다. 그는 뒷산 폭포수 밑에서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득음을 했다. 그의 노래 인생엔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3남 4녀 대가족의 장남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랐다.“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장구잡이였어요. 아버지가 돼지를 몰며 장구가락을 치셨고, 그 가락이 자연스럽게 몸에 스몄죠. 장구가락도 익혔고 목청도 트였겠다, 고등학교 땐 친구들과 ‘더 빡빡스’라는 이름의 밴드를 만들어 놀았어요. 주판으로 박자를 맞추는 아마추어 밴드였죠. 물론 보컬은 저였고요. 군대에서도 문화선전대에 배속돼 노래를 불렀고, 제대 후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퇴근 후엔 낙원동에 있는 가요학원을 다닐 정도로 음악을 놓지 않았어요.”이처럼 노래를 사랑했던 그였지만 노래를 생업으로 삼게 된 것은 1994년, 45세에 이르러서였다. 그 전까지 25년간은 보험회사 무역회사 전자회사 등을 전전하며 샐러리맨으로 지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작은 풀씨 같은 미물도 꽃을 피우고 죽는데 내 인생을 이대로 저물게 해서는 안 되겠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 국악에 매달렸다. 3년간 태평소 명인이 되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그렇게 익힌 태평소는 오늘의 그를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이후 그는 1993년의 전주대사습 공주농악과 1994년에 있었던 금산 농악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또한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에선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국악계의 떠오르는 얼굴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시쳇말로 대박이 터진 것. 그의 숨겨진 재능은 물 만난 듯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하지만 그의 진짜 재능은 딴 데 있었다. 그가 각종 국악공연 후 갖는 뒤풀이에서 선보인 구성진 노랫가락들이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 이후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 국악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임동창 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장사익은 본격적인 소리꾼의 인생을 살게 된다.“제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은 ‘저것도 노래냐. 노래에 박자가 없어서 손뼉을 치려고 들어갈 틈도 없다. 흥이 안 난다’며 질타했죠. 요즘 유행가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노랫가락보다는 강한 비트가 있는 반주만 들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자연의 비트인 사람의 호흡으로 박자를 끊어내는 제 노래가 낯설 수밖에 없어요. 노래엔 목소리가 주인공이 돼야 합니다. 저는 노래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그에게 냉담했던 사람들이 그의 팬으로, 마니아로 돌아서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장사익이 소리판을 벌인다고 하면 한 달 전에 전 좌석이 매진된다. 천여 명의 고정 팬들은 그가 이 땅 어디서 판을 벌이든 찾아간다. 1996년 첫 콘서트 이후 2년마다 갖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은 10년째 매진 사례다. 지난해 5집 발매 기념으로 가졌던 ‘사람이 그리워서’ 콘서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연 시작 한 달 전에 2회 공연 6000여 석이 전부 매진된 것. 공연 관계자들도 ‘미스터리한 일’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장사익의 힘’이다.“올해는 일을 많이 벌여놨어요. 6월엔 한 달간 미국 순회공연을 합니다. 뉴욕 시카고 워싱턴 LA 등지를 돌 예정이죠. 문화관광부가 한국을 전하는 대표적 소리꾼으로 인정해주고 후원도 해주세요. 7~8월엔 배 타고 3개국을 돌면서 공연하고, 10월엔 이란 등 중동 4개국에서 소리판을 벌일 예정이죠. 12월엔 전국 순회공연을 가질 계획이에요. 안사람이 매니저를 해줘서 일하는 것 같지도 않고 편해요. 이런 게 살아가는 행복이겠죠.”강한 흡인력의 가객 장사익. 그는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온몸으로 소리를 뿜어내는 듯한 특유의 창법으로 장르를 간단히 초월한다. 이토록 많은 공연에서 그만의 창법으로 있는 힘껏 불러 제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얼까. 반드시 체력이 받쳐줘야 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 유지 비결은 바로 ‘마라톤’이다. 팬들과 함께 달리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그에게 마라톤 얘기를 꺼내자 얼굴에 화색이 돈다.“얼마 전 여의도에서 열린 마라톤에 참가했어요. 예전에 무릎 인대가 파열돼 다리가 아파서 달리는 것은 꿈도 못 꿨는데, 재작년부터 조심스레 시작한 마라톤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오랜 시간 달리다보면 몸은 너무 힘들지만, 마음은 가뿐하죠. 특히 공연 전엔 ‘공연이 잘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원을 하며 달려요.”그는 말을 하다 갑자기, 자연의 숭고한 질서를 머금은 듯한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자유로운 그의 노랫가락이 귀에 착착 감긴다. 그의 바람대로, 나이 70~80의 할아버지가 돼서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 마라톤’이 변함없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