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민이라고 하면 화려한 이국 생활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한가로이 바다낚시를 즐기거나 한적한 골프장에서의 멋진 티샷을 생각한다면 은퇴 이민은 분명 안락한 노년을 보내기 위한 최상의 선택이다.그러나 긍정적인 면만 보고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실패를 맛볼 수 있다. 골프 등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잠시뿐이다. 소일거리 없이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향수병 탓에 몸과 마음에 모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은퇴 이민 1세대 중 상당수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국내로 유턴하면서 ‘딱히 뭘 할 게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은퇴 이민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현지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생각해보고 출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현지인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도 은퇴 이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얼마 전 필리핀 일간지 곤잘레스에는 ‘무례하고 상스러운 외국인들’이라는 제목의 독자투고가 실렸다. 한 필리핀 가정부가 쓴 이 글에는 ‘남의 나라에 와서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울 지경’이라면서 한국 은퇴 이민자들의 실태를 낱낱이 꼬집었다. 은퇴 이민 성공, 실패 사례를 살펴보자.주택 개조해 어학연수생 임대박세현(54) 씨에게 필리핀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박 씨가 필리핀에 오게 된 것은 4년 전의 일이다. 주식투자로 수억 원을 날린 박 씨는 가족과 함께 단돈 8000만 원을 들고 필리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 씨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월 임대료 25만 원)에 살면서 필리핀에서의 사업을 준비했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학원부터 등록했다. 어학원에서 2~3개월 동안 영어를 배운 뒤 그는 필리핀 대학 출신 영어강사를 구해 4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영어회화를 익혔다.필리핀 사람들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박 씨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돈 월 80만 원에 방 7개, 가사 도우미 방 2개, 운전사 방 1개가 딸린 저택을 임대한 그는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임대 사업을 벌였다. 박 씨는 1000만 원을 추가로 들여 집을 리모델링했고 가전제품도 새롭게 구입했다. 가사 도우미도 2명 더 채용했다. 박 씨가 사업을 시작한 2002년부터 필리핀은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박 씨의 집은 근처에 유흥가도 거의 없는 조용한 지역이어서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방 5개를 12명에게 임대해 그는 매달 20만 페소(4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거뒀다. 가사 도우미, 식자재비, 전기세 등으로 총 11만~13만 페소(220만~260만 원)가 지출됐으며 나머지 7만~9만 페소는 모두 순이익으로 남았다. 필리핀에서 7만 페소면 고위 공직자 월급과 맞먹는 수준이다. 다만 방학이 되면 하숙생들 상당수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성수기와 비수기가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박 씨는 요즘 시간이 날 때면 집 근처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다. 필리핀에서 수준급으로 꼽히는 이 골프장은 그린피가 1인당 2만5000원, 캐디피는 4000원이다. 라운딩이 끝나면 1시간에 1만2000원인 마사지에서 피로를 풀며 안락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알선업체 실적·사고여부 챙겨야정문석(62) 씨는 은퇴 이민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다. 한국에서 의류 도매상을 한 정 씨는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은퇴 이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의정부와 부천에 각각 빌라를 2채 가지고 있는 정 씨는 이곳에서 매달 100만 원씩의 임대료를 받고 있었고 종신연금 50만 원, 국민연금 40만 원까지 합치면 총 190만 원씩의 고정 수입이 있었다. 은퇴 이민을 떠나기로 결정한 다음날 모 알선 업체를 찾아가 국가별 은퇴 이민 제도와 알선 업체의 이민 실적, 사고 발생 여부 등을 꼼꼼히 따져봤다.말레이시아로 떠난 정 씨는 쿠알라룸푸르 외곽에 월 2470링깃(66만5000원)을 주고 3층짜리 고급 주택을 임대했다. 정 씨가 사는 곳은 말레이시아에서도 비교적 고소득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인건비는 월평균 1050링깃(28만 원)이고 전기세, 수도세도 비슷한 수준이다.매달 352링깃(9만5000원)의 사용료를 내는 골프장은 말레이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골프 코스다. 한 달 동안 정 씨의 지출액은 6316링깃(170만 원). 한국에서의 고정 수입만으로 정 씨는 여기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정 씨는 “해외 이민을 떠나기 위해서는 알선 업체가 제시한 조건 및 계약 내용, 알선 회사의 평판 등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현지인 마찰 심화돼 중도 포기전직 공무원 출신의 김성남(61·가명) 씨는 지난해 6월 필리핀으로 부부 동반 여행을 다녀온 뒤 은퇴 이민을 결정했다. 여행 가이드로부터 “생활비도 저렴하고 골프도 실컷 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김 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여행 시 알게 된 한 필리핀 교민으로부터 집과 차량을 구입하는 등 은퇴 이민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처음 몇 달간은 정말 꿈속 같았다. 집안일은 모두 가정부에게 맡기고 김 씨 부부는 매일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골프장까지도 운전사가 바래다줬다.그러나 언어 문제는 김 씨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기 일쑤였고, 결국 가정부는 집안 물건을 들고 말도 없이 사라졌다. 또 생각했던 것보다 날씨가 무더워 골프를 하기 위해 5~6홀을 돌면 금세 지쳤다. 현지인들과 마찰도 많았다. 한 번은 운전사가 하도 운전을 험하게 해 화를 냈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와 위협을 하기도 했다. 현지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결국 김 씨는 8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턱없이 비싸게 산 주택 낭패부산에 사는 김동천(59·가명) 씨는 은퇴 이민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가 태국으로 은퇴 이민을 떠난 것은 지난 해 5월이다. 국내 한 이민박람회에 참석해 은퇴 이민을 알게 된 김 씨는 ‘2년만 살다 오겠다’는 생각을 하고 태국으로 향했다.김 씨는 휴양지로 유명한 태국 치앙마이에 2층짜리 고급 주택을 월 4만6600바트(130만 원)에 임대했다. 치앙마이의 유명한 휴양지와 각종 마사지 서비스를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김 씨는 황당한 소식을 들었다. 김 씨가 사는 곳은 외국인 전용지역으로 타 지역에 비해 집값이 비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그러나 주변 집들은 월 임대료가 평균 2만 바트(57만 원). 이에 김 씨는 부동산을 중개한 교포를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소리만 들었다. 이중가격의 폐해를 경험한 김 씨는 서둘러 집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김 씨는 “한국인 정착촌을 건설한다고 홍보한다면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면서 “이중가격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 집들과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 필수”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