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콕콕 찍어 철학을 담았다”

김점선은 이야기꾼이다. 물론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녀가 내던지는 말 속에는 단순하면서도 비범한 그녀의 철학이 담겨 있다. 30대의 사춘기를 앓고 있다고 괴로워하면 어설픈 설교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청춘이 원래 그런 거야. 고민이 없으면 그게 청춘이냐!”라는 한 마디가 전부다.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보폭을 넓게 벌려 바삐 걸어가고 있는 거위, 원색을 써서 그린 아이리스와 맨드라미, 눈웃음치는 말과 코끼리 등도 그저 주변에 있어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그녀와의 관계성, 관념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상화된 이미지다. 개성 출신인 그녀의 집에서는 어려서 개 대신 거위를 키웠었다. 뒤뚱거리는 거위 그림은 “꽃은 먹지 마. 풀만 먹어”라는 그녀의 명령을 무시(?)하고, 잡으려고 하면 도망 다녔던 거위의 기억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거위는 대부분 항상 쫓기듯 바쁜 모습으로 성큼성큼 걷고 있다.1983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매년 1회 이상 전시회를 갖고 있는 그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그림 그리다보니 몇 년 전 몸이 경고등을 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왼쪽 어깨가 아팠다. 그렇지만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면 되니까 계속 그렸다. 그랬더니 오른쪽 어깨까지 아파왔다. 손을 치켜들 수도 없고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오십견이었다. 발목을 다친 무용수처럼 정신은 말짱한데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때 컴퓨터 전문가인 아들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태블릿(tablet)을 설치해 줬다. 가로, 세로 10cm의 작은 판 위에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혹사시켰다고 보이콧을 하는 그녀 어깨의 도움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손끝으로 마우스 펜을 움직여 여러 가지 색을 콕콕 찍어가며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풀어낼 수 있었다. 김점선의 디지털 그림이 등장하게 된 계기다.이런 컴퓨터 그림 중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화투시리즈’. 세 사람 이상만 모이면 고스톱을 칠 정도로 서민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있는 화투는 없애야 할 나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화투 외에 다른 그림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할머니도 하루 종일 화투치면서 놀았어. 화투를 말야, 천박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오염된 거라구. 이게 민중오락, 민중미술, 팝아트야.”그녀는 나쁜 친구가 계속 주변을 둘러쌌으면 틀림없이 감옥에 갔을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집에서 탄 돈으로 물감 사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얼음물에 손을 넣고 기저귀를 빨고,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깎으며 사는 고난을 이겨내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남자와 한 달 만에 결혼을 해버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남편을 비롯해 그녀의 주변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설가 박완서, 이해인 수녀, 장영희 교수 등 각계각층에 친구를 두고 있다. 대화가 통해야 친구가 될 수 있는 법. 그녀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느 누구와 얘기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지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잡지에서 반항 문화의 상징인 비트족(beatnik)에 관한 기사를 읽고, 국어 교과서 외에는 한글로 된 책을 읽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영어공부를 해서 미국 감리교에서 통역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장화홍련전’에서부터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도 한 독서가다. 여기에 그녀의 철학과 사상이 더해져 김점선의 정신세계가 성립돼 있는 것이다.영화만 찍고 오락 프로그램에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배우도 있고,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고 반했다가 작가의 뜬금없는 작품 설명에 실망하고 그를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화가이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김점선. 그녀는 언제까지 멀티플레이어로 우리와 소통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림이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