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주역이었던 정조(正祖, 1752~1800). 한편으로는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서 한평생 정치 개혁과 아버지에 대한 회한으로 점철했던 임금이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隆陵)을 경기도 화성군 송산리 화산자락에 모시고 융릉의 원찰인 용주사를 중창했다. 정조 자신의 무덤은 아버지 능 옆에 마련하고 건릉(健陵)이라 이름 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는 군왕이 된 후 헌신적인 노력으로 살아있는 동안 다하지 못했던 효심을 눈물겹도록 펼쳤다.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이상향인 신도시 건설로 새로운 세상을 펼친 곳이요, 아울러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심이 어린 영원한 사부곡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수원은 정조의 지극정성을 영원히 빛나게 승화시킨 아련한 곳이다.隆陵,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 융건릉(隆健陵)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융릉과 정조와 효의황후(孝懿王后) 김씨가 합장된 건릉이 모여져 붙인 이름이다. 얕은 구릉으로 이어진 화산자락에 능역까지 푸근한 솔숲 사이로 난 흙길을 소풍하듯 걸어가면 왕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잘 다듬어진 공원 같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은 음력 섣달 햇살에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홍살문을 뒤로하고 정자각과 능묘가 한눈에 들어온다. 융릉 병풍 담 뒤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봉긋하게 솟은 봉우리가 한눈에 보아도 서기가 넘친다. 융릉의 형국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인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으로 지세가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 정조는 이런 지세를 알고 융릉에서 내려다보이는 오른쪽 용의 머리 자리 부근에 여의주 모양을 한 원형의 연못을 파게 했다. 화룡점정처럼 용이 여의주가 없으면 결정적인 무엇이 없어 보일 터인데, 이 연못은 여의주 형상을 했으니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조형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 이런 형태의 연못은 한국의 다른 곳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 동북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경이다.思悼世子, 비극의 운명 사도세자란 영조가 아들 장헌세자를 28세의 꽃 같은 목숨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땅에 묻고 나서야 후회하며 붙여준 시호다. 사도란 죽은 세자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장헌세자는 영조 11년(1735년) 1월 11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映嬪李氏), 이름은 선(?), 자는 윤관(允寬)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장헌세자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요절했기에 장헌세자는 두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됐다. 세 살에 ‘효경’을, 일곱 살에 ‘동몽선습’을 떼고 문장과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줄 만큼 영특했다. 영조의 나이 마흔에 얻은 외아들이니 사랑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자의 나이 열 살에는 벌써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처사를 비판할 만큼 정치적 성숙도를 보여 노론을 불안케 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정략적 이익과 의리 때문에 사화와 당쟁이 빈발했다. 그 와중에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총명한 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정치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집권세력 노론에는 세자의 언행이 눈엣가시가 되어 ‘내버려 두면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힌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운명은 그렇게 시작됐다.세자가 병약한 부왕을 대신해 정무에 임하자 가시처럼 경계하기 시작한 측은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황후, 숙위 문씨 등이었다. 이들은 드디어 세자의 행동에 무고를 하기에 이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며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자연 영조의 꾸지람이 잦았고, 부자 사이에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세자에 대한 모함은 줄기찼으며,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는 사이 세자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세자가 부왕 모르게 관서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온 것은 1761년. 윤재겸 등이 상소를 올려 동행했던 관리들이 모두 파직됐다. 그리고 이듬해 운명의 5월 13일. 세자의 행동이 부덕하다며 정순황후와 그 아비 김한구, 같은 파인 홍계희 등이 상소를 올린 데다 문소의(文昭儀)의 이간책에 영조는 격분하고 만다. 후궁인 문숙원의 고발과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적은 10개항의 상소를 올리자 대로해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창경궁 뜰 뙤약볕에 내놓아 공개 체형의 벌을 내린다. “한 번만 살려 달라”는 절규에 찬 몸부림도, 어머니 영빈 이씨와 이제 열 살 된 아들 정조의 간곡한 애원도 모두 외면당한 채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세자는 죽었다. 그때가 1762년 5월 21일 일이다영조는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 기슭에 아들을 묻고서야 비정했던 자신의 처사를 크게 후회하고 친히 나가 곡을 하며 제주를 했다고 전한다. 묘호를 수은묘(垂恩墓), 시호를 사도(思悼)라 내렸다. 장헌세자빈에 책봉된 혜경궁 홍씨는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며 한평생 울분에 가득한 비극적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헌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이 된 홍씨는 정조가 즉위하며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올랐다. 이때부터 혜경궁 홍씨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순조 15년(1815) 12월 15일 8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융릉에 묻혔다. 우리나라 궁중문학의 백미인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남편 장헌세자의 기막힌 운명과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기록한 자서전이다.正祖, 불꽃같은 삶 참으로 드라마 같은 비극적 운명이다. 정조는 영조 이전부터 조성되어 온 당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 장헌세자를 잃고 왕위에 올랐으니 위험 요소는 언제나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었고 오랜 권력의 단맛에서 헤어나지 못한 무리들에게 영특한 정조는 더할 나위 없이 성가신 존재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정조는 영조 28년(1752)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다. 기상(氣像)이 늠름하고 체상(體狀)이 특이하며 성품이 곧고 영특해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촉망받는다. 정조는 나이 일곱 살에 세손에 책봉됐으나 불과 열 살에 아버지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한다. 아버지를 잃고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가 영조가 승하하고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이후 세수 49세(1800년) 의 젊은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불꽃같은 삶을 정치 개혁에 바친다. 정조가 재위한 25년의 조선 역사는 문예 부흥기로 찬란히 빛난다. 규장각을 설치해 인재를 등용하고 도서를 간행했으며 탕평책을 시행, 당파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날의 상처와 한을 무던히도 감내하며 갸륵한 효성과 치적으로 승화한 것이었다.龍珠寺, 궁궐의 면모 주사는 융릉과 이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21년(970년)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胡亂)으로 소실된 채 숲 속에 묻혀 있었다.1789년 7월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영건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해에 이루어지는 용주사의 재건은 바로 현륭원의 원찰로 조성됐다.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를 재건할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불화를 제작할 화원이 필요했다. 조정은 김홍도와 이명기를 내정했다. 이 두 화원에게 좀더 새로운 화풍을 접할 기회가 필요했다. 그해 11월 동지사행의 일원으로 청나라 사찰(寺刹)이며 연경(燕京)의 천주당 벽화 등을 직접 견문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1790년 김홍도는 연경에서 돌아오자마자 2월부터 9월까지 꼬박 216일 동안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의 제작을 주관 감동(監董)하여 완성했다. 김홍도가 제작한 이 불화는 당시 연경의 천주교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서양화법, 그중에서도 명암법, 원근법 등을 본격적으로 수용한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회화기법은 당시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이러한 이채로운 결과물을 낳게 한 배경은 무엇보다도 이 화역을 지시한 정조의 전진적인 회화관이 결정적 요인이었지만, 북학이라는 시대사상의 새 물결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용주사 불화가 갖는 독특한 성격은 1794년에서 1796년에 걸쳐 이루어진 화성의 축조가 북학파 이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해 이루어진 것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다.용주사는 일반 사찰의 건축 구조와는 사뭇 다른 궁궐(宮闕)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우선 사찰 진입로에 보이는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이 없다. 일주문 대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같은 삼문을 두고 사찰 역역을 구획했다. 일주문격인 삼문을 들어서면 왕궁에서나 이름 붙이는 ‘천보루(天寶樓)’가 관가의 건물처럼 막아서고, 천보루 앞에 작은 오층 석탑 한 기가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다. 천보루는 사찰누각이라기보다는 궁궐의 한 전각 같은 웅장한 규모와 위용이 인상적이다. 평면에서 보면 천보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ㅁ’자형 요사를 연이어 건축했다. 정면에서 보면 건물의 구조가 한 몸체로 보여 그 규모가 마치 창덕궁 어느 전각을 보는 듯하다. 용주사가 융릉의 원찰인 데다 정조의 지휘 감독 하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궁궐규모로 사찰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천보루 아래를 지나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화산의 아늑한 봉우리가 배경으로 삼아 단정하지만 당당하게 자리한 대웅보전을 마주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 대웅보전은 정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단원 김홍도가 그린 후불탱화가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고색창연하다. 천장에는 화려한 닫집에 용과 봉황 그리고 여의주 장식과 화려한 연등천장이 장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삼존불의 조각 솜씨도 조선 문화 절정기였던 당시의 조형답게 작지만 아름답다. 대웅보전이 그야말로 작은 조선후기 문화의 보물창고다. 대웅보전 앞마당 천보루 건물 위로 내리는 겨울 햇살이 따뜻하다.정조의 갸륵한 효심 융건릉은 여주 영릉만큼 크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건릉처럼 엄청난 규모의 석수나 석인상이 없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 닿아서이리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정조는 살아서는 생부 사도세자의 신원(伸寃)과 한을 풀어드리고, 죽어서는 자신도 부모 묘소 부근에 나란히 묻히는 천복을 누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조의 갸륵한 효심에 숙연해진다.| 융릉 전경. 수원 화성에 있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능으로 지극한 효심이 이루어 낸 절세의 명품이다.| 건릉. 정조의 능으로 사도세자 능인 융릉과 이웃하고 있다. 능역이 완벽하다.| 융릉 입구 원형 연못. 융릉의 풍수지리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어서 정조가 일부러 풍수에 부합하도록 원형의 연못을 능 앞에 조성했다. 독특하면서도 아름답다.| 건릉 홍살문과 정자각이 한겨울 햇살에 따뜻하게 빛난다.|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김홍도가 연경의 서양화법을 응용한 음영법으로 그린 불화다. 당시로는 혁신적인 화법이다.| 용주사 대웅보전. 정조의 친필 현판과 김홍도의 불화가 있다. 생부 사도세자의 원찰로 조성됐다.| 용주사 천보루. 누각의 규모가 궁궐의 풍모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