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바롤로와 함께 순도 높은 와인의 명산지로 꼽히는 곳이 바르바레스코다. 바르바레스코는 워낙 유명해 주변 지역을 대표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네이베(Neive)와 트레이조(Treiso)에서도 가장 좋은 와인에는 바르바레스코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르바레스코 와인은 세 마을에서 양조되는 셈이다. 그리고 바롤로처럼 네비올로(nebbiolo)로만 만든다. 피노누아로만 만드는 코트도르(Cote d’Or)와 같은 방식이다. 바르바레스코와 부르고뉴의 유사성은 단일 품종이라는 점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크뤼(cru) 포도밭에서 생산된 것도 공통점이다. 바르바레스코의 크뤼에는 별도의 이름이 붙어 있다. 몬테스테파노(Montestefano) 아질리(Asili) 세콘디노(Secondine) 라바야(Rabaja) 등이 그것이다.크뤼는 주변 포도밭보다 해발 고도가 높다. 서늘한 기후를 가진 바르바레스코에서 포도를 제대로 익히려면 경사가 있는 언덕이 제격이다. 그래야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있는 포도밭은 겨울에 눈이 많이 쌓여도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눈이 녹는다. 바르바레스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크뤼 포도밭의 포도로만 만든 와인이고, 다른 하나는 크뤼 포도밭 포도와 일반 포도를 혼합해 만든 와인이다. 전자는 싱글 빈야드(single vineyard) 와인이다.바르바레스코 탑으로 가는 도중에 왼쪽에 있는 라바야를 찾았다. 라바야는 바르바레스코에서 가장 높은 구역에 있으며 그 높이가 311m에 이른다. 포도밭은 남서향과 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 아래로는 타나로 강이 흘러 주변 지역과는 다른 미세 기후를 형성한다. 즉 일년 내내 바람이 분다. 여름에는 뜨겁게 달궈진 포도 알들을 시원하게 달래주며, 비가 와도 금방 말려준다. 가을 늦도록 오래 오래 포도를 익혀야 네비올로의 참맛을 잉태할 수 있기에 산 높은 곳에 위치한 라바야 포도밭은 개성 강한 바르바레스코를 빚어낸다.이곳에서 브루노 로카(Bruno Rocca)를 방문했다. 그는 라바야 바르바레스코를 대표하는 양조자다. 라바야 꼭대기를 관통하는 찻길 옆으로 자그마한 집이 그의 양조장이다. 큰 딸 루이자(Luisa)는 남동생 프란체스코(Francesco)와 함께 방문자를 맞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이자는 3년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양조장의 홍보를 맡고 있으며, 프란체스코는 6년 과정의 중·고등학교에서 양조학을 전공하고 있다. 600여 명이 거주하는 바르바레스코에는 현재 양조장이 99개 있다고 한다. 마을이 온통 양조장으로 가득찬 셈이다.1978년부터 양조장 일을 하고 있는 브루노는 하루 종일 포도밭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라바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창을 내고 파수꾼처럼 포도밭의 동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부모가 1964년부터 라바야를 개간했지만, 처음부터 가족 이름의 와인을 만들지는 않았다. 한때는 프로두토리 델 바르바레스코(Produttori del Barbaresco: 바르바레스코 와인 조합으로 포도밭 주인은 그저 포도 재배만 하고, 양조와 판매 및 홍보는 조합에서 총괄한다)에다 포도를 팔기만 했던 시절도 있었단다.가장 오래된 와인을 보여 달라는 말에 그는 1981년 빈티지의 돌체토를 꺼내 보였다. 그때는 라벨 디자인도 조악했다. 라바야의 개성에 눈 뜬 브루노는 싱글 빈야드 와인 양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힘 좋은 나무에서는 6송이, 그렇지 않은 나무에서는 2~3송이 정도로 소출을 제한했다. 약 5ha의 라바야를 손금 들여다보듯 한다는 그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라바야의 판매 호조로 그간 벌어들인 돈이 꽤 될 텐데, 그것으로 뭘 했느냐고 물었더니 “포도밭을 샀다”고 짧게 답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셈이냐고 했더니, 이젠 충분하고 더 이상은 무리라고 한다. 앞으로는 생산량 확대보다는 품질 개량을 위해 포도밭 노동을 더 열심히 할 작정이란다.브루노는 매년 55000병 정도를 병입하며, 그 중 라바야는 약 2만 병 정도 된다. 그는 두 종류의 바르바레스코를 더 만든다. 하나는 일반 바르바레스코이고, 다른 하나는 코파로사(Coparossa)다. 코파로사는 두 지역의 포도를 혼합해 만들며, 라바야보다는 좀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다.곳에 따라 높게는 PH8에 이르기도 하는 이곳 토질은 알칼리성을 띤다. 토양은 석회암 지대의 칼슘 성분이 많으며, 늦가을까지 익어가는 네비올로는 알코올 도수 14.5%에 이르는 고알코올 와인이다. 여기에다 타닌이 들어 있는 포도 껍질도 두껍기로 유명하다. 라바야 바르바레스코가 구조가 안정적이고 튼튼해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와인으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