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기상이 깃든 땅
영, 이름만 불러 봐도 정신이 새롭다. 다도해, 듣기만 해도 가고 싶다. 한려수도, 얼마나 신선한 이름이더냐. 그림처럼 섬들이 떠 있다. 갈매기 끼룩거리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비릿한 바닷바람만으로도 나그네 마음은 설렌다. 짙푸른 바다, 흰 구름 둥실, 물살을 가르는 뱃고동. 그곳이 바로 통영이다. 초겨울 비가 내리고 바람 끝이 차갑게 스쳐지나가는 통영에는 윤이상 추모음악제 현수막이 도시의 거리마다 휘날린다. 옛적부터 문인 화가 등 예술적 자질이 돋보이는 인물이 많기로 유명했던 통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부터 역사 속에 떠올랐다.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이 설치되면서 그 준말이 불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충무라는 지명도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에서 따온 이름임을 미루어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이 넉넉히 짐작된다. 통영에는 아직도 그 유적이 남아 있으니 통영시 문화동 여황산 기슭에 선 세병관(洗兵館)과 충무공 위패를 모신 충렬사(忠烈祠)가 그것이다.세병관, 역사의 흔적에 바람만세병관은 선조 36년(1603)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순신의 위업을 기림과 아울러 삼도수군통제사영으로 쓰기 위해 지은 정면 아홉 칸 측면 여섯 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조선 후기의 건물치고는 기교의 치우침이 없고 간결하게 지어진 조선 수군의 본영다운 당당함이 풍기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서울의 경복궁 경회루와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바닥 면적이 넓은 조선집으로 손꼽힌다. 세병관은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 중 “어찌하면 장사를 얻어서/하늘에 잇는 은하수를 끌어와/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어서/다시는 전쟁에 쓰지 않도록 할까?”라는 구절에서 ‘병기를 깨끗이 씻는다’라는 뜻의 한자말 ‘세병’에서 따온 이름이다. 역사의 흔적에 바람만 스친다.세병관은 마치 군대의 행렬처럼 정연하게 배열돼 있는 기둥들이 단순하면서도 절도 있는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건물의 중앙 세 칸의 뒤쪽 부분에 마룻바닥을 한 단 높인 곳이 궐패를 모시는 자리이며, 그 공간만은 우물천장과 삼면에 창호 문을 만드는 등 다른 공간과 구분하고 있다. 창호 문 위쪽에는 사군자와 옛날 군인들의 전투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으며, 통제사들의 이름과 통제사 휘하의 직제 등도 적혀 있다. 천장은 궐패가 놓이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등천장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를 양성했다.보물 제293호인 세병관은 단일 건물이 갖는 위엄을 한껏 보여준다. 민흘림기둥이 도열한 정면은 단순한 건강미가 돋보이고, 건물 정면에 붙인 ‘세병관(洗兵館)’ 현판은 가로 길이가 2m가 넘는 크기다. 글씨는 거의 집채만큼 커다란 크기의 동국진체풍의 행서로 쓰여 있다. 참으로 무인다운 호방함이다. 초겨울 오후 햇살이 멀리보이는 통영항, 소금기를 머금고 길게 세병관 마루로 비친다. 항구의 뱃고동이 들리는 듯하다.충렬사, 청춘의 그리움을 가슴깊이 묻어 두고충렬사는 선조 39년(1606) 제7대 통제사로 온 이운룡이 왕명에 따라 지은 이순신의 사당이다. 충렬사는 현종 4년(1663)에 사액 받았으며 같은 해 강당과 동·서재를 갖췄는데 통제영이 해체될 때까지 291년 동안 삼도수군통제사가 봄·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적 제236호로 등재돼 있다.충렬사 입구 2층 누각 장한루를 통과해서 올라가면 외삼문이 나온다. 외삼문 좌우로는 비각 여섯 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들 비각 안에는 광해군 7년(1615)에 이항복이 짓고 송시열이 쓴 충렬묘비를 비롯해 모두 11기의 비가 들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숭무당, 왼쪽이 경충재다. 마당을 거쳐 중문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이곳을 지나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내삼문의 돌기둥 아랫부분 신방석에 조각된 해태의 표정과 모습이 고졸하고 익살맞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한 자그마한 건물로, 안에는 충무공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충렬사에는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이라는 진귀한 보물이 있다. 이 명조팔사품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인으로부터 이순신의 빼어난 전공을 보고받은 명 황제 신종이 이순신에게 보낸 여덟 가지 물품이다. 도독인 하나, 호두령패 한 쌍, 귀도 한 쌍, 참도 한 쌍, 독전기 한 쌍, 홍소령기 한 쌍, 남소령기 한 쌍, 곡나팔 한 쌍으로 이뤄졌다. 신관호가 이를 여덟 폭의 그림으로 그린 ‘명조팔사품도’도 함께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도 충렬사에는 요즘의 해군 관함식과 비슷한 충무공 당시의 관함식을 그린 ‘수조도(水操圖)’가 있다. 수조도에 보이는 관함식은 충무공이 처음 시작했고 제6대 통제사 이정균이 격식화해 매년 두 번씩 행해져 왔다. 거북선 43척을 위시한 대소 전선 548척, 장졸 3만6009명이 등장하는 이 관함식 그림은 통제영 말기 타총종사품으로 봉직하던 정효헌이 높이 183cm 넓이 648cm로 그린 것이다.충렬사 유물관에 스무 명 남짓의 늙은 전역 군인들이 올라 왔다. 저마다 가슴에는 훈장을 달고 장식이 많은 모자를 쓰고 때로는 번쩍이는 계급장을 붙인 옷을 입기도 했다. 유물관에 들어서자 이순신 장군의 기상과 위업을 흠모하는 듯 얼굴에서 감격의 기색이 역력했다. 몸은 비록 늙었지만 기상만큼은 젊은 시절 못지않아 퇴역 장성의 목소리에는 정정한 힘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당신의 현역 시절이 그리운 듯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하고 몇몇은 말없이 유물만 바라본다. 모두들 젊은 시절 청춘의 그리움을 가슴깊이 묻어 두고 삼삼오오 충렬사를 내려갔다. 바람만 괜히 빈 사당 앞을 스친다.통영 공예의 전통적 미감통영에는 전통공예품이 많이 생산된다. 이를테면 통영칠기라든지 통영갓, 통영반닫이 통영소반, 통영장석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많은 전통공예품이 유독 한꺼번에 통영에서 맥을 이어오는 것은 통제영이 있었던 덕분이다. 통제영은 최초로 한산도에 두었으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거제 여수 등으로 옮겼다가 1604년 통영으로 옮겨왔다. 통제영이 병영으로서 안정을 되찾게 되자 통제사가 그 안에 병참기지 구실을 하는 육방 십삼 공방을 두고 갖가지 군수물자를 만들게 했는데 거기에 이와 같은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도 딸려 있었다.이 13공방은 부채 칠 그림 대장간 활통 신 말안장 놋쇠 금은 갓 말총 장롱 상자를 만드는 곳을 일컬었다. 이러한 공방의 명성은 아직까지 남아 갓 나전칠기 소목장 등은 통영의 것을 제일로 알아준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통제영을 없앰으로써 이 공방도 절로 문을 닫게 되자 몇몇 장인들이 홀로 제 공방을 열고 일을 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오늘날의 통영 공예는 그와 같은 장인들의 대물림으로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왔다.통영의 공예품들은 대체로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조선시대 미감이 통괄하는 유교적 문인 취향의 절제되고 검소한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르다. 예술의 양식은 시대상과 사용자의 지적 기호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통영의 전통공예품은 옛날 통제영의 군수물자 보급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곧 무인의 호방한 기상과 기질에 어울리는 전통적 미감으로 발전해 왔다. 전라도 반닫이나 강원도 소반에서 보이는 장식이 배제된 단순함과는 달리 통영 반닫이나 자개장에서 보이는 화려한 백통장석 장식이나 고급스러운 공예기술은 모두 통영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삼도수군통제사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는 강화도 숭숭이 반닫이에 무인적 기질의 화려한 미감이 짙게 배어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세월이 그 사이로충무공이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한산도 제승당을 뒤로 하고 남해의 아름다운 뱃길 한려수도의 겨울바다를 바라다본다. 매물도, 한려수도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기암절벽과 만년풍상이 어우러져 만든 천혜의 절경이다. 배를 타고 섬에 뚫린 바위구멍으로 들어가 보라. 작은 우주의 신비로움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 절벽 위엔 꽃이 피고 나무가 서있다. 자연의 섭리가 살아 숨쉰다. 유람선을 타고 흐르는 빛바랜 유행가는 벼랑 끝 바위에 걸리고 방파제 파도소리는 듣는 이 없이 흩어진다. 세월이 그 사이로 간다.초겨울 저녁, 통영 앞바다 노을이 진다. 다도해 섬 사이로 지는 노을에 나그네의 우수가 물든다. 저 해가 지면 또 밤이 오고 지친 영혼들을 달래겠지. 괜한 생각을 해 본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