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업은 행복 비즈니스 우리 유물 지킴이 될래요”
핏이라는 찬사를 받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말 그대로 앞만 보고 인생을 달려왔다 그는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의 척박한 토양에서 기업을 일군 재계의 산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재 세중나모여행 등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고 레슬링협회와 세중옛돌박물관 업무를 돌보는 등 문화 체육계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한국 경제가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처럼 천 회장도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가다. 천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 연구원과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동양철관이란 회사의 공장장으로 일하다 창업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제철소(포항제철)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연관 산업에 진출하면 큰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제철산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그는 포항제철(현 POSCO)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콜타르 오일과 라이트 오일 등을 활용해 벤젠, 콜타르 피치 등을 만드는 공장을 만들기로 하고 퇴직금과 친구에게 빌린 돈 등을 모아 자금을 마련, 제철화학을 설립했다. 이후부터 그의 사업은 고난과 도전의 연속이었다.“당시 순수 국산 기술로 공장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죠. 일본에 기술자를 보내 공장을 견학시키고 영국 기술자도 데려와 겨우 공장을 만들어 설비를 가동할 수 있게 됐죠. 그런데 시험 가동 중 폭발 사고가 났습니다. 이른 새벽 현지 공장장이 전화했는데 저는 직감적으로 사고라는 사실을 알았죠. 공장장에게 다짜고짜로 ‘몇 명이 죽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세 명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길로 공장에 내려갔는데 모두 당황해서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경황이 없었지만 저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임원들을 모아놓고 내일 보너스를 100% 지급하라고 지시했죠. 직원들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 것이죠. 종업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분위기는 안정됐습니다. 또 유가족들에게도 원하는 만큼 보상하도록 했습니다. 실제 유가족과의 협상에서 두말없이 당시 최고 보상액을 줬어요. 너무 큰 돈을 보상해 비슷한 사고가 났을 때 다른 기업의 부담이 너무 커지게 됐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돈은 나중에 또 벌면 된다고 생각했죠.”우여곡절 끝에 사업은 안정 궤도에 올라섰다. 포항제철이 증설을 거듭하면서 부산물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사업 규모도 더 커져갔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또 다른 결심을 한다.“포항제철이 계속 증설하는데 맞춰 우리도 설비를 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만한 돈이 없었어요. 제가 하기에는 너무 사업 규모가 커져버린 것이죠. 그래서 큰 기업이 이 사업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회사를 팔았습니다.”제철화학은 이후 동양화학이 인수하면서 현재 동양제철화학으로 거듭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 그는 물러설 때를 알았던 셈이다. 제철화학을 매각한 후 그는 섬유 원단 수출 사업 등을 하다 1982년 세중여행을 창업한 것을 시발로 운송 정보기술(IT) 게임 컨설팅 등 10여 개 계열사를 잇달아 인수 또는 설립했다. 이 가운데 세중여행은 그의 뚝심을 기반으로 상용 여행 분야에서 1위로 도약했다.“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의 해외여행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는 기업 고객을 집중 공략했습니다. 그런데 기업 고객들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갑자기 출장을 가야 한다며 항공권과 여권을 부탁하는 일이 자주 있었거든요.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고객의 요구를 충족시켜 줬습니다. 한번은 모 그룹 임원 10명이 내일까지 미국 텍사스로 가야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막막했죠. 일단 내일 공항으로 무조건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을 새워서 항공사들을 닦달해 미국 LA 노선 비행기 티켓을 확보했습니다. 물론 10명 티켓을 모두 구하지는 못했지만 도쿄를 경유해 LA로 가는 노선까지 뒤져 결국 10명을 모두 텍사스로 보냈습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또 100명이 할 수 있는 일을 60~70명이 하게 하되 이익을 많이 내면 돌려준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그래서 성과를 많이 냈을 때 1200%까지 보너스를 주기도 했습니다.”천 회장은 사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 유물 보전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도 순전히 우연한 계기에서였다.“개인적으로 골동품과 서화 도자기 등을 좋아했어요. 하루는 인사동 단골집에 갔는데 주인이 일본 사람과 흥정하고 있더군요. 무언가 하고 봤더니 우리나라 전통 석조 유물이었던 거예요. 일본인이 간 다음 주인에게 ‘왜 일본사람에게 우리나라 유물을 파느냐’고 호통을 쳤죠. 그 주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데다 일본 사람은 값을 좋게 쳐주겠다고 해서 팔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전부 얼마냐고 물었더니 1억7000만 원어치라고 하더군요. 당장 그 돈을 주고 27점의 유물을 한꺼번에 사들였습니다.”이후 그는 해외로 무차별 반출되던 우리나라 전통의 석조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문인석 무인석 동자 석등 석탑 등 다양한 종류의 국내외 유물이 모아졌고 이를 토대로 ‘세중옛돌박물관’(www.stsmuseum.co.kr)이 탄생했다. 옛 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반영하듯 그의 집무실 벽에는 ‘꾸밈이 없는 것, 사심이 없는 것,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뽐내지 않는 것, 민초의 손맛, 이것이 어여쁘지 않고 무엇이 어여쁠까’란 글이 붙어 있다.체육계에서도 그는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과의 친분으로 레슬링협회에 관여하게 된 그는 국제레슬링연맹 집행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이건희 회장이 레슬링협회 국제담당 이사를 맡아달라고 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국제 체육계 인사와 교류를 확대하고 관계를 돈독히 해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영향력 확대를 모색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레슬링이 월드컵 7연속 금메달을 따냈고 정원이 15명밖에 되지 않는 국제레슬링연맹 집행위원에도 한국인이 두 명이나 선출되기도 했습니다.”이런 그의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은 명예와 보람이다. 그는 우리나라 독자 기술로 공장을 지었다는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 유물 환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도 받았다. 체육계 활동을 통해서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훈장과 표창 등은 모두 다른 분들이 추천해 주신 덕분에 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감사원에서 저를 추천해 국민훈장을 받았는데, 공무원의 잘못을 감시하는 감사원이 상을 추천한 것은 제가 처음이었다고 하더군요.”사회에 대한 공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세중나모여행 주식 110만주(약 110억 원)를 고려대 연세대 포항공대 세중문화재단 등에 기부하기로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에 앞서 이미 그는 1982년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인 땅 6만3000평을 포항공대에 기부하기도 했다.“나누면 기쁨과 행복이 커집니다. 기부하고 봉사하는 삶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지만 제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합니다.”글 김남국·사진 이승재 기자 nkkim@hankyung.com천신일세중나모여행 회장고려대 정치외교학과한국경제문제연구회 연구원제철화학 설립국제레슬링연맹 집행위원©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