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사는 무소유 경영 전도사

'성주 생식’으로 유명한 황성주(49) 이롬 회장은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항상 ‘꿈’ 얘기로 시작한다. 학창 시절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고 그 꿈을 키워오는 과정이 오늘날 자신의 성공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기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황 회장은 서울대 의대를 나왔지만 처음부터 공부를 잘 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목장 주인이 되고 싶었어요. TV에 나오는 목장의 풍경에 막연한 동경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는 광주일고에 진학했는데 1학년 때 반에서 40등, 전교에서 450등 정도 했어요. 우등생은 못됐지만 목장 주인이 되는 데는 큰 문제없는 성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1학년 마지막 수업시간에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왔습니다. 미술 선생님께서 인생을 회고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섬에서 1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기였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다시 육지로 발령 받아 섬을 떠날 때 온 마을 주민들이 울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선생님의 그 말씀은 희생과 봉사가 얼마나 큰 보람을 주는지 일깨워줬고 새로운 꿈을 갖게 했습니다.”그의 새 꿈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일생 동안 가장 많은 봉사를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꿈을 위해 서울대 의대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현실과는 큰 거리가 있었다.“서울대 의대에 가려면 이과에서 전교 10등 안에는 들어야 되겠더군요. 그래서 2학년 때부터 공부에 몰입했습니다. 첫 시험 때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는데 결과는 반에서 20등, 전교에서 260등을 하는데 그쳤어요. 오기가 들어 두 번째 시험을 앞두고는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했죠. 덕분에 성적이 반에서 5등, 전교 26등으로 껑충 뛰었습니다. 비로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고 1학기 말에는 전교 19등까지 올라갈 수 있었죠.”그러나 그의 꿈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고 3때는 다시 성적이 전교 40~60등으로 내려갔어요. 하지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는 서울대 의대를 지원했고 결국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아버님 사업이 기울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부모님께 큰 실망을 드린 거죠. 그래도 꿈을 포기할 수 없어 재수 끝에 1년 뒤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s)’란 말을 좋아하게 됐습니다.”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형편은 여의치 않았다. 가세가 더욱 기울어 등록금조차 내지 못할 처지가 된 것. 다행히 주위의 도움으로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의사 가운을 입을 수 있었다. 이후 안정적인 의사 생활을 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대체의학을 접하면서 또 한번 인생 항로를 바꾸게 된다.“하루는 어떤 지인이 찾아와 ‘독일에 신기한 항암제가 있는데 식물에서 추출한 것이고 부작용도 없다’는 말을 해주더군요. 평소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는 모습을 봐왔던 터라 이 분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겠다는 생각에 독일행을 결심했지요. 그곳에서 한국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현대의학과 대체요법, 식이요법과 여러 가지 자연요법을 통합한 치료방법을 공부하게 됐습니다.”그는 새로운 치료법을 접한 후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스스로 병원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대체의학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그래서 그 분야에서 저는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성인병 및 암 치료 전문병원인 사랑의 클리닉을 설립한 후 암 환자에게 대체의학을 곁들인 치료를 하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연매출이 50억 원에 달했는데 이는 병상 50개를 둔 병원에서 올릴 수 있는 수준입니다. 저는 병상 하나 없이 외래로만 환자를 봤으니 놀라운 성과였죠.”환자들에게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전해주다가 황 회장은 생식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여러 요법 가운데 생식의 효과에 관심을 가졌는데 적당한 가격에 믿을 수 있는 제품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저는 생식회사를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창업하기 전에 비슷한 회사가 있었죠. 에디슨도 전구를 발명한 23번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에디슨은 이전 발명자들과 달리 전구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투자금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납니다. 저도 좋은 제품을 일반인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업을 벌인 게 다른 사람과의 차이였던 것 같습니다.”그는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이롬’이란 회사를 차리면서 ‘이롬주의’라는 원칙을 세웠다. 원재료 관리 및 품질과 관련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가장 좋은 원료를 유기농으로 재배해서 제품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원재료 공급업자가 유기농 재배를 하지 않은 제품을 납품하는 등 회사를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황 회장은 자체 연구소에서 원재료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원칙은 제품에 대한 신뢰성을 키우는 원천이 됐다.또 사업 초기 유통망이 없었을 때 휴대전화 한 대만 있으면 누구라도 방문판매원이 돼 제품을 팔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정책도 효과를 봤다. 판매원 모집 광고 첫날 1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이후 이들은 방문판매 등을 통해 훌륭한 유통 채널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매망이 안정되자 전국에 대리점도 개설했다. 또 판매원들이 건강 컨설턴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강화했고 아예 판매원 명칭도 ‘건강 설계사’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건강 설계사는 1만 명에 달한다.품질과 서비스, 능력 있는 경영진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롬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1999년 회사 설립 첫 해 매출은 1억 원에 불과했지만 이듬해 24억 원으로 늘었고 이후 100억 원, 180억 원, 300억 원, 500억 원, 700억 원 등 해마다 외형을 키워갔다. 최근에는 미국 골드만삭스가 이롬의 성장성을 높이 평가해 250억 원을 투자하기도 했다.고비마다 이뤄진 적절한 판단도 사업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생식 사업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풀무원 대상 CJ 등 대기업들도 이 시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대기업과 경쟁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시장 자체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줬죠. 결국 대기업들이 시장에 참여하면서 예상했던 대로 시장 자체가 커졌어요. 우리 회사는 이때 제품 이름을 ‘황성주생식’으로 바꿔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썼고 더 커진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황 회장의 최근 관심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생식을 먹을 수 있도록 가격을 낮추는 것이다.“더 많은 사람들이 생식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가격을 낮춰야 합니다. 문제는 가장 좋은 유기농 원료를 쓴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가격을 낮추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식의 저력은 매우 높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나 마음 편하게 사서 먹을 수 있는 가격대로 낮추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이롬은 또 해외 진출과 제품 다각화도 추진하고 있다. “김치 인삼에 이어 생식을 자랑스러운 한국의 제품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쥬보(JUVO)란 브랜드로 80여 개 매장에서 생식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미국인 중 채식주의자가 1000만 명이 넘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 생식의 우수성을 알릴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생즙, 양념, 건강 기능식품, 화장품 등 건강과 아름다움에 도움을 주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 출시하고 있습니다.”기업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지만 황 회장은 여전히 집 한 채 없다. 돈이 생기면 대안학교(충남 서산에 있는 꿈의학교)나 자선단체(의료 봉사단체인 국제 사랑의 봉사단)의 활동비 등으로 활용했다. “저는 분당에서 월세 220만 원짜리 집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돈이 없어요. 현재 보유하고 있는 이롬 주식도 다 기부하려 했더니 주인 없는 회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위에서 만류하기에 그냥 갖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부 연합체 등에 주식을 맡길 생각입니다. 결혼도 저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사람에게 한눈에 반해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집이 없어 처갓집에서 지냈던 적도 있었죠. 사실 저는 대학 때부터 무소유의 삶을 동경했어요. 그런데 기업을 하다보니 무소유의 삶이 기업가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도전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돈이 고용을 창출하고 부가가치를 만드는 분야에 투자돼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부동산이 너무 올라 모두가 집값에만 신경 쓰고 있어요.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그는 앞으로도 사회봉사와 젊은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한다.“난초는 가만히 놔둬도 죽고 너무 많이 손을 대도 죽습니다. 적당한 환경만 만들어줘야 제대로 피어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처럼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꿈의 발전소’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