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정욱의 미학세계 탐험
림 속에 있는 이 사람은 소녀인가 아줌마인가. 앞머리는 단발을 하고 볼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 것을 보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소녀 같기도 하고, 쌍꺼풀 수술 자국에 퉁퉁한 얼굴 위로 거뭇거뭇 피어있는 기미를 보면 자기 관리를 잘 안 하는 아줌마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가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요소들을 이미지화한 것이에요. 제가 알고 있거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뭉쳐진, 말하자면 집단 초상화라고나 할까요. 한 사람을 그렸지만 사람들이 캔버스 속 인물을 보고 어떤 캐릭터를 입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는 다중인격자인거죠. 그림 속에 다양한 것이 응축돼 있어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읽혔으면 좋겠어요.”여러 신체 부위 중에서 심리 상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눈이다. 저마다 동공 크기가 다르고, 눈빛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지 표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화가 김정욱이 화면에 가득 들어차게 그린 얼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도 눈이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선명한 눈동자를 가진 인물은 단 하나도 없다. 일부는 흰자위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 검은 눈동자가 눈 전체를 덮고 있어서 그냥 새까맣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조차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명확하지 않은 눈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읽히지 않게 뭉개진 얼굴로 그리는 도미에의 작품도 마찬가지. 일상생활의 모습을 주로 그린 그의 작품 속 인물에는 구체적인 표정이 없다. 아니, 그 표정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더 많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된다. 강가에서 빨래를 마치고 아직 어려서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에 부쳐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귀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 ‘세탁부’. 그림 속 그 여인이 성난 표정을 짓고 있는지, 피곤함이 역력한 지친 표정을 하고 있는지, 기운 없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지 작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이의 몫인 것이다.“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의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복잡다단한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것이 바로 눈이죠. 문학적 장르에 비유하자면 눈은 짧은 몇 마디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시(詩)와 같아요. 저도 그림을 그리면서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해요. 속눈썹을 강조해서 그린 눈도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속눈썹이 길다는 사실)만을 담고 있지는 않죠. 기본적으로 속눈썹은 눈을 보호하는 것이지만 무엇인가를 가리는 것일 수도 있고, 반면에 속눈썹이 왜 그렇게 길까 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더 강조하는 게 될 수도 있지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뿐 제 생각이 그림으로 완성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삐딱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다이어트 열풍에 휩싸인 요즘에 맞서기라도 하듯 뚱뚱보를 그리질 않나, 바늘 자국이 선명한 쌍꺼풀(수술이 잘못되었거나 부작용을 일으킨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진 눈에, 깨끗하고 맑기는커녕 여드름과 기미로 얼룩진 피부는 외모지상주의를 추종하는 현대 사회에 일침이라도 놓으려는 작정인 듯 여겨진다.“비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의 모습을 그렸을 뿐이에요. 그냥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베이컨의 작품을 보고 어떤 사람이 ‘당신은 왜 그렇게 징그럽고 무서운 그림만 그리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현실은 더하다고 말했다죠. 어찌됐든 저는 쌍꺼풀 수술을 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면 각기 다른 경험을 하고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그림 속 인물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거죠. 아직 덜 아물어서 아프겠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고, 수술이 실패해서 속상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저 사람은 왜 머리로 눈을 가렸을까.’하고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다가 ‘예전에 힘든 일이 있었을 때 나도 저렇게 하고 다녔는데.’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요.”그가 인물의 얼굴에 뾰루지를 그리는 것도 추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춘기 여드름인지, 신경성 여드름인지, 알레르기인지 알 수 없지만 얼굴에 트러블이 생긴다는 것은 인체 내부에서 어딘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이 어떤 사람의 심리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런 순간순간의 느낌을 잡아내기 위해서 그는 한지에 직접 스케치를 해서 그린다. 에스키스(esquisse, 작품을 그리기 전에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구상한 이미지를 미리 그려보는 것)했을 때의 생생함이 화면에 옮겨지면서 어딘가 모르게 둔탁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는 인물을 그렸다. 요즘의 작품과 달리 그때는 사람들이 날씬했고 상반신, 무릎 위 혹은 전신을 그렸다. 지금처럼 카메라 렌즈에 들이민 듯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소파에 앉아 있거나 손을 잡고 서 있거나 널브러지듯 엎드려 있는 그림 속에서도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눈이다. 흰자위에 섬처럼 떠있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들은 마치 어딘가에 놀란 듯 겁에 질린 모습이다.때로는 한쪽 눈은 눈동자를 더 작게 짝짝이로 그려 마치 실명을 한 눈처럼 보여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그림 속에는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이 담겨 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삶을 대하는 자세는 사뭇 다르다. 이전에는 즉각적으로 대항했다가 크게 좌절하는 양상이었다면 지금의 인물들은 아주 능청맞다. 어떤 자극을 받아도 제법 의연하게 받아치는 것이다.“예전에는 저를 보면 ‘작품하고 많이 다르네요.’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자화상이죠.’하고 물어봐요. 작품 어딘가에 저와 비슷한 부분도 있겠지만 작품 속 인물과 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이런 것을 보면 아마 저의 기질들이 작품 속에 점점 더 많이 투영되는가보다 싶어요.”©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