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건축거장 스카르파의 예술혼

난 백 년 동안 현대건축사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는 누구였을까. 지난 세기는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새로운 운동과 사조가 시작된 격변기였고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의 각 분야에서 수많은 거장들이 배출됐다. 건축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건축계에서는 지난 세기를 ‘거장들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매기는 성적표대로라면 20세기의 3대 거장에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비제, 바우하우스 운동을 탄압한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마천루들을 세운 미스 반 데 로헤, 미국 건축계를 좌지우지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꼽힌다. 여기에 핀란드의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건물들을 설계한 알바 알토를 추가해서 20세기 ‘4대 거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건축을 전공하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을 좀더 깊게 이해하면서 앞의 거장들과는 다른 건축가를 내 마음속의 진정한 20세기 거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앞의 거장들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넘는 많은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그러나 1906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카를로 스카르파에게는 평생 단 십여 개의 건축물만을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외의 대다수 프로젝트들은 영구히 보존되는 건축물이 아닌, 전시장을 꾸미는 것 같은 작업들이었다. 그는 대신 이탈리아 무라노 유리공예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는 그가 단지 건물만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장인정신을 이해하고 직접 그 작업의 일부를 수행한 장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스카르파는 만년에, 그러니까 1969년에 자신의 최대 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그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명문가문인 브라이언 가문의 묘지를 설계하는 것으로, 넓은 옥수수 밭 가운데에 조그만 채플과 묘지 그리고 정원을 설계하는 특이한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를 ‘20세기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거장들은 수백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서 행복하고 유복한 건축가의 삶을 살았지만 스카르파에게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기껏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해봐야 이 브라이언 묘지 정도였다. 그는 대신 이 프로젝트에 온 정열을 다 쏟아 부을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건축가로 하여금 ‘브라이언 묘지가 지난 세기의 최고 걸작이며 그가 가장 뛰어난 건축가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브라이언 묘지에는 지난 세기 다른 거장 건축가들이 마치 정치인처럼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것 같은 거창한 이념은 없다. 스카르파는 정식으로 건축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무라노의 유리공장에서 작업하면서 배운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을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반영했을 따름이다. 이 건물이 한국에서 요즘 그렇게 잘 팔리는 이탈리아 명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함께 이 건물에서는 그의 동양에 대한 애착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일본을 자주 여행했고 갑자기 세상을 뜬 것도 1978년 일본을 여행하던 중 당한 불의의 사고 때문이었다. 스카르파는 죽어서 자신의 최대 걸작인 브라이언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이 묘지에는 아직도 전 세계 건축학도들의 방문과 애도가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