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갑부 제프 베조스 아마존 회장

년 월스트리트에 있는 헤지펀드 회사 디이쇼(D.E.Shaw)의 수석부사장실. 이제 갓 서른이 된 한 젊은이가 메모지에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고 있었다. 미래엔 전자상거래 시장이 급성장할 것이란 뉴스를 접한 그는 인터넷을 통해 무엇을 팔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었다.‘레코드 CD롬 꽃 컴퓨터소프트웨어 책…책이라!’ 갑자기 머릿속이 번쩍하면서 메모지에 상품 이름을 적던 그의 손이 멈췄다. 30분 뒤 그는 사표를 쓰고 연봉 100만 달러(약 10억 원)짜리 직장을 떠났다. 그 길로 집에 간 그는 부인과 함께 이삿짐을 쌌다. 아내가 차를 모는 동안 그는 뒷좌석에서 노트북으로 사업계획서를 짰다.차가 멈춘 곳은 시애틀. 교외에 집을 빌린 그는 창고에 ‘커대브러(Cadabra. com)’라는 인터넷 기업을 차렸다. 프로그래머 4명과 함께 중고 가구를 고쳐 만든 책상에서 밤낮으로 프로그램 개발에 매달렸다. 디이쇼 시절 사귄 사람들에게는 전화를 걸어 사업 자금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능력을 믿었던 지인들은 선뜻 200만 달러를 모아줬다. 3개월쯤 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책을 파는 기업을 출범시켰다. 회사 간판도 아마존(amazon.com)으로 바꿔 달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인 브라질의 아마존에서 영감을 얻은 이름이었다. 세계 최초, 세계 최대의 인터넷 서점은 이렇게 탄생했다.그리고 아마존을 세운 제프 베조스라는 이름의 이 젊은이는 지금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나이 이제 42세다. 그는 아마존을 통해 당시로선 낯설기만 하던 인터넷을 새로운 쇼핑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인터넷 쇼핑’의 개척자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의 이 같은 공적을 인정, 199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경제전문지 포천도 2003년과 2004년 연속으로 그를 ‘올해 최고의 경영인’으로 뽑았다. 그는 아마존의 성공과 함께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포브스지가 추산한 그의 재산은 현재 43억 달러에 달한다. 세계에서 147번째 부자다.베조스는 1964년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신동이었다. 일찍부터 과학영재학교에 들어가 ‘천재 교육’을 받았고 아홉 살 때는 신동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의 광고 인물로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베조스의 천재성을 다룬 책까지 나왔다고 한다.그는 프린스턴대학에 들어갔고 컴퓨터공학과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가 투자회사 디이쇼의 최연소 부사장에 오른 것이 28세였고 아마존을 세운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아마존도 시작부터 성공적이었다. 회사 설립 초기 그는 도서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경보가 울리도록 해두었는데 사업을 시작한 지 2~3개월 만에 경보를 해제하지 않고서는 시끄러워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아마존은 이후 급성장을 거듭,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틀어 세계 최대 서점으로 자리를 굳혔다. 판매 품목도 CD 비디오 휴대폰 의류 액세서리 등으로 확대했다. 인터넷 서점을 넘어 인터넷 종합 쇼핑몰로 변신한 것이다. 베조스 회장은 최근에는 ‘블루 오리진’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어린 시절의 꿈인 우주여행을 추진하고 나서 화제를 모았다. 2003년에는 창사 후 처음으로 흑자를 냈다. 2004년에는 6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규모 면에서 오프라인 최대 서점인 반스앤노블(48억 달러)을 완전히 따돌렸다.아마존의 성공 비결은 스피드와 행동을 중시하는 베조스 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관련이 깊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단 움직여라. 실수는 나중에 고쳐라.”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도해 보지도 않는다면 정말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확신이 서면 주저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행동 철학은 ‘빠른 자가 느린 자를 제압하는’ 인터넷 세상의 생리와 잘 맞아떨어졌다.그렇다고 베조스 회장이 무턱대고 덤비는 스타일은 아니다. 반대로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치밀하고 합리적인 계산이 뒷받침돼 있다. 지난 2003년 전격적으로 대외 광고를 중단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인터넷 업계에선 베조스 회장이 ‘악수’를 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브랜드 인지도가 중요한 인터넷 기업이 회사 이미지 광고를 중단한 것은 큰 실책이라는 것이다.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사전에 샘플 도시를 선정해 실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그는 광고를 중단하면 브랜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배송비를 낮출 수 있어 고객들의 관심과 로열티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수치로 확인했다. 그는 이처럼 막연한 ‘감’이 아니라 ‘실험과 분석’을 중시하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사람을 뽑을 때는 무엇보다 창의성을 중시한다. 간부급 직원 채용 면접에서 한번은 “미국에 주유소가 몇 개나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마존의 거래 품목 가운데 아직까지 석유 제품은 없다. 따라서 주유소가 1000개든, 1만 개든 그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이처럼 엉뚱한 질문을 한 진짜 이유는 면접 대상자의 재치와 순발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황당하다 싶은 질문을 불쑥 던졌을 때 톡톡 튀는 기발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을 간부로 뽑는다는 게 그의 채용 철학이다. 그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간부직에는 보통 사람을 위한 자리가 없다.”며 ‘간부의 천재화’를 요구한다.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며 “배우자를 구할 때도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을 원했다.”고 말할 정도다.아마존이 세계적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했고 그 자신도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지만 베조스 회장은 ‘짠돌이 경영’으로 소문이 나 있다. 그는 창업 초기 직원을 채용하면 직접 헌 문짝과 각목으로 직원들의 책상을 만들어줬다. 아마존 직원들은 지금도 그때와 같은 형태의 책상을 쓰고 있고 베조스 회장도 여전히 직원들과 같은 책상을 쓴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직접 만들지 않고 목공소에 주문하고 있지만….이 같은 구두쇠 경영은 아마존이 오랜 기간 적자를 면치 못한 데 따른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소비자가 왕’이라는 베조스 회장의 경영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허름한) 책상은 근검절약의 상징으로 아마존이 고객을 위해서만 돈을 지출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매우 강도 높은 근무 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아마존에서 연장 근무는 일상사다. 복장에 대한 간섭이 별로 없어 언뜻 보기엔 느슨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유무형의 압력이 그 어느 회사보다 강한 편이다.한번은 스톡옵션으로 백만장자가 된 직원들이 주가 움직임에 신경을 쓰는 것을 두고 “월스트리트는 잊어버려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는 “우리 중 누구도 당장 내일의 주가를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앞으로 5년 뒤의 주가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5년 뒤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라.”고 주문했다.보안에 대한 집착도 유달리 강하다. 직원들에게는 기자들의 사소한 질문에도 절대로 대답하면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려놓고 있다. 판매량이나 베스트셀러 순위 같은 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직원 수조차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라이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가 새 나가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것이다.그는 일할 때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이지만 일상생활에선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불운’에 시달릴 때 오히려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 외부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2003년 3월 헬리콥터 사고로 머리를 다쳤을 때의 일이다. 당시 그는 목장을 구입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텍사스 외곽지역을 돌아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강풍이 몰아치며 헬기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사고 후 병원 신세를 진 그는 1년 뒤 시애틀 본사에 돌아왔다. 그는 머리의 상처나 헬기 추락으로 입은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연신 웃음을 지으며 사고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사고는 영화 속 슬로 비디오처럼 천천히 진행됐습니다. 헬기가 추락하는 순간 심오한 인생의 진리 따위가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이렇게 바보같이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익살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번 사고로 매우 전술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가능한 한 헬리콥터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헬리콥터는 날개가 고정된 일반 비행기만큼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2000년 ‘인터넷 거품 붕괴’ 때도 그는 민첩하게 위기를 돌파했다. 당시 아마존 주가는 100달러에서 6달러로 폭락했다. 그는 재빨리 투자자들을 초청해 기업설명회를 열었다. 그리고 투자자들에게 지금은 아마존 주식을 살 때가 아니지만 조만간 실적을 끌어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3년 뒤 그는 창업 이후 첫 흑자 전환을 통해 약속을 지켰다.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말이 있다. 진입 장벽이 낮고 언제 어디서 경쟁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터넷 세상에선 더더욱 그렇다.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이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뛰어넘어 아마존의 경쟁상대로 부상했다. 또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업체인 구글과 온라인 경매 업체인 이베이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다. 베조스 회장의 도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