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화가 데비 한의 미학세계
는 누구인가.’ 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한 즈음에 작가 데비 한의 삶의 화두였다. 이민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초등학교 5학년 때 LA로 이주한 그녀는 사춘기를 거치면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아버지마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삶에 대한 허무함까지 더해져 혼돈은 더욱 걷잡을 수 없게 됐다. “LA에 있는 한국 사찰에 갔다가 스님이 준 한국 녹차를 처음 맛보았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자들은 이 차를 마실 때 화장을 해도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차 한 잔을 마시더라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정신문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콜라를 마시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죠. 물질적이고 편리한 삶이 핵심이 되는 LA에서 성장하면서 근본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서는 비켜 서 있었던 제게 무척 강한 인상을 주었답니다.”대학교를 졸업한 1993년에는 한국에 여행 와서 전라남도에 있는 천년 고찰 태안사에서 참선하는 등 우리 문화를 체험해 봤다. 그때 그 추억들이 자신을 흔들어 놓았다는 그녀.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작업하다가 마침내 2003년 영은미술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서울에 입성했다. 6개월 여 간의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는 쌈지 아트 스페이스 입주 작가로 머물렀다. 그러면서 또 1년이 지나 기간이 만료됐으나 그녀는 서울을 떠나지 않고, 인사동에 공간을 마련해 작업하고 있다.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면서 몰아(沒我)의 경지에 빠져드는 것을 느낀 데비 한은 장차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음악이나 미술 등은 선택 과목으로, 원하지 않으면 배우지 않고도 졸업이 가능했다. 이런 교과 과정 수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그녀는 대학교 서머(Summer) 프로그램을 수강하면서 고등학교 여름 방학에는 대학 캠퍼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런 그녀에게 홍대 앞 입시 미술 학원 앞에 나란히 걸려 있는 데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한국에서는 미술 대학에 가려면 학원에 다니면서 데생부터 시작해서 그림을 배우잖아요. 한국 미술 교육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닌 시스템이고, 치러야 할 과정이고,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이것은 미술이다, 이렇게 그려라.’는 것에 불과하지 않나요. ”이후 미국과 다른 한국만의 독특한 재료가 무엇일까 찾다가 도자기를 떠올렸다. 그 중에서도 청자는 한국의 미와 섬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재였다. 그래서 서구 미술의 아이콘인 비너스를 빚어서 청자로 구워내는 작품을 선보인 것. 작품의 입술을 자세히 보면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는 개성,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주지 않는 사회에서 교육받는 한국 젊은이들을 은유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비너스가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교육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국 여성의 몸에 비너스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 작품 속의 비너스는 서구의 미를 추구하는 여성을 상징한 것이다.그녀의 이전 작업 중에 ‘달콤한 세상(sweet world)’이라는 시리즈가 있다. 초콜릿을 이용해 변기 모양을 형상화하고, 뉴욕 거리에 있는 개똥을 채집해 그것으로 초콜릿을 만드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 작품. 뉴욕의 미용실을 다니면서 잘린 머리카락을 수거해 그것을 이용해 막대 사탕을 만들기도 했다(인종이 다양하고 머리색이 다양해서 색색의 사탕을 만들 수 있었다고).“바닥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혹은 하수구 망에 걸려 있는 젖은 머리카락은 사람들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하잖아요. 그래서 머리카락의 형태를 달리하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었죠. 초콜릿 똥도 마찬가지예요. 진리는 산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대변, 그것도 진리일 수 있고 진실의 한 부분이지요. 심오하고 철학적인 것을 팝(pop)적인 요소로 풀어내면서 고정 관념을 해체해 보자 하는 시도였어요.”사실 신체와 영혼, 섭취와 배설은 서로 상반된 것이지만 두 개가 아닌 하나다. 아름다움이 있으면 추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태어나면 결국 죽는 것과 같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 둥근 원처럼 연결돼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난 세기만 해도 예술이라는 것은 그 안에 아름답고 예쁜 것을 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현대 미술, 이른바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라는 것은 지적인 자극과 도전을 주면서 문화의 흐름 구조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 지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우리 삶 속의 현실과 진실을 작가의 눈을 통해 나누고 번영하는 것이 바로 현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사회의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요. 즉 작가는 사색을 해야 하고, 작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기교가 아니라 비전(그 사람의 삶의 진실)이 아닐까요. 또한 일반인들도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술은 단순히 보여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던져주는 것을 능동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사고와 의식을 교류하는 것이죠. 예술을 통해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체험을 한다는 것처럼 흥미로운 일이 있을까요.”©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