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모은 재물은 아니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참으로 멋지게 사회를 위해 쓰고 죽은 부자가 더러 있다. 석재 서병오(1862~1935)는 대구의 만석꾼 부자로서 평생 동안 서화를 창작,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서울의 10만석꾼의 상속자로서 자칫하면 사라져버릴 뻔한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삼촌 집에 양자로 들어갔고, 양부와 친부 모두에게 상속받아 엄청난 부를 가졌지만 재산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한 사람은 예술창작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문화재 수집에 몽땅 썼다.그들이 혼을 담은 예술과 문화유산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풍류 있는 난봉꾼이 가산을 탕진한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을 것인가. 사유재산을 철저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지 않고 단순히 개인 취미나 기호에 따라 재산을 탕진했더라면 비웃음 이상의 관심을 끌 수는 없었을 것이다.근세 대구의 명물 중 하나로 꼽히는 석재 서병오(徐丙五)는 시(詩)·서(書)·화(畵)·문(文)·금(琴)·기(碁)·박(博)·의(醫)의 여덟 가지에 능해 팔능거사(八能居士)라고 불렸다. 철종 13년(1862) 대구 성내에서 만석꾼이던 대구 갑부 서상민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 서상혜에게 입양된 그는 생가(生家) 만 석, 양가(養家) 만 석씩 2만 석을 물려받은 부자에다 그가 가진 여덟 가지의 재주를 각각 만 석씩 쳐서 사람들은 그를 10만석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신동으로 소문난 석재는 어려서부터 집안 대대로 시주를 많이 하는 대구 인근 팔공산 동화사에서 공부했는데, 부모는 아들이 공부에 태만할까봐 매일 화선지 전지 한 장에 그날 글씨 공부한 것을 써서 심부름꾼에게 보내도록 했다고 한다.어린 서병오의 재주가 서울에까지 소문이 나자 당시 대원군은 그를 불러 재주를 시험하고 귀여워하면서 자신의 호 석파(石坡)에서 한 자를 따 석재(石齋)란 호를 내렸다고 한다. 27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늦게 신령군수가 됐으나 벼슬에는 아예 뜻이 없었다. 마흔 후반에 긍석 김진만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 가서 당시 갑신정변으로 망명 중이던 민영익의 집에 기식하면서 중국 서단의 거물인 치바이스(齊白石) 우창숴(吳昌碩) 쑨원(孫文) 등의 인사와 교유하며 문인화와 사군자를 배웠다. 그 후 대구에서 교남서화연구회를 발족, 후진 양성에 몰두했으며 이때 글씨와 그림을 가르친 제자로서 민족시인 이육사, 서예가 죽농 서동균, 풍곡 성재휴, 긍석 김진만, 운강 배효원 등이 있다. 그의 나이 회갑 무렵(1922)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와 사군자’부문에서 박영효 이완용 김규진 등과 함께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고 김성수에게 ‘인촌(仁村)’이란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그는 또 회갑이 지나 늦은 나이에 석곡 이규준(1855~1923)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웠으며, 71세의 노년에 21세의 천재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의 개인전 발기인이 되기도 할 만큼 예술을 사랑했다. 예술적 멋을 알고 수많은 권번 기생들과 염문을 뿌리는 일화를 남긴 그는 타고난 로맨티스트였으며, 바둑과 장기 거문고는 물론 서민들이 즐기는 투전 골패 등 못하는 놀이가 없었다. 73세의 고령에 당시 경북 지사 아베(阿部)가 초청해 바둑 대국을 가졌다. 아베는 석재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아베가 석재를 붙들어 밤을 새웠고, 과로한 석재는 뇌일혈로 1주일간 의식을 잃었다가 끝내 숨졌다.일생을 예도(藝道)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작품은 이리 저리 흩어진 까닭에 잊혀져 가다가 뜻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대구 달성공원에 ‘예술비’를 세웠고(1983), 대구화랑 주인 김항회가 주축이 돼 흩어진 작품을 모아 ‘화집’을 발간해(1998) 그의 자취를 다소 더듬을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간송(澗松) 전형필(全灐弼). 그는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생가 양가로부터 물려받은 10만 석 재산을 아낌없이 쓰고 죽었다. 올해가 간송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라서 지난 5월 탄생 100주년 기념‘명품 100선전’도 열려 10만 인파가 관람하기도 했다. 종로(배오개)의 땅 부자였던 전영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간송은 작은아버지 댁에 손이 없어서 그 댁 양자로 들었다. 그런데 형과 생부 양부 모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양쪽 집 재산을 다 물려받아 청년 갑부가 됐다.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1929), 고보 때 스승이었던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르침과 3· 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고서화와 도자기 등 문화재를 사 모으는 데 썼다. 그는 값진 유물을 무조건 닥치는 대로 모으지는 않았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간송은 우리 미술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모습으로 자리매김한 때가 속종에서 정조(1675~1800) 기간임을 알고, 이 시기의 핵심 작가인 겸재 추사 단원 혜원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모았다.”고 말했다. 참으로 사려 깊은 통찰이라 하겠다.고재희가 쓴 ‘문화재 비화’에는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지킨 비화를 여러 가지 싣고 있다. 그 중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을 두고 교토의 야마나카와 숨 막히는 경매에서 최종 낙찰을 받은 이야기나, 영국 귀족 출신으로 1914년에 일본 도쿄에서 국제변호사로 활약하던 존 개스비(J. Gadsby)가 수집한 ‘청자기린형향로(국보 제65호)’를 비롯한 고려청자 10여 점을 거금 10만 원(기와집 50채 값)을 주고 일괄 구입한 일은 참으로 통쾌한 거래라 하겠다.간송의 수집 일화 중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훈민정음 원본(국보 지정 논란이 있을 때마다 국보1호로 지정돼야 한다는 바로 그것)의 입수 일화다. 1942년 늦여름에 간송은 자주 들르던 한남서림에서 한 골동품상으로부터 경상도 안동에 훈민정음 원본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책 주인이 1000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돈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당시 1000원의 값어치는 참으로 엄청나게 컸다. 이때 간송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나와 여러 번 거래해 봐서 아시겠지만 물건은 제 값을 주고 사야지요.”그리고 선뜻 1만1000원을 전해 주면서, “책 주인에게 1만1000원을 전하세요. 그리고 1000원은 수고비로 받으세요.”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 최대의 자산인 한글(훈민정음)의 원본을 고스란히 지켜냈다는 것이다. 그는 수집한 수많은 문화재를 성북동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에 보관·전시하고, 더 나아가 교육 사업과 미술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참으로 선각자다운 면모다.그는 문화재 한 점 지키는 일이 ‘왜놈 한 놈 죽이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독립운동임을 일깨웠다. 간송은 문화재를 지켜내는 일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재산의 씀씀이인가. 재산을 이보다 더 멋지게 쓸 방도가 있을까.그 어떤 사람이라도 자손 대대로 재산을 지킬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부를 지키되 참으로 보람 있는 사업을 찾고, 이러한 사업을 찾았다면 과감히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질 줄 알아야 진정한 부자이고 그렇게 해야만 소중한 재산의 가치가 영원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납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만큼이나 멋진 일인 것이다. 단순한 난봉꾼으로 스캔들을 뿌리며 향락으로 일생을 보내며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나, 남을 의식하지 않는 이기적 수집가로서 혼자만 탐닉하다가 재산을 탕진한 부자를 기억하고 존경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