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라이프치히
지 않은 독일인들이 통일 이전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정작 통일이 되었지만 두 개의 체제로 나뉘어져 있던 그간의 경제적 격차는 말 못할 소외감을 안겨 주었고, 구동독 지역의 급격한 쇠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 동독지역을 방문하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독일인들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적어도 옛 흔적만을 더듬어 본다면 라이프치히 역시 화려했던 과거를 기억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최근 독일 월드컵 열풍에 힘입어 뒤늦게 우리의 주목을 받은 독일 도시가 있다. 한국과 프랑스전이 열렸던 라이프치히. 월드컵이 열리기 전 본선 진출국의 조 추첨이 열리면서 일찌감치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비교적 친숙해졌지만 사회주의 정권 시절 이곳은 그저 세계사 교과서에 ‘종교개혁’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오는 먼 곳이었다. 그런 낯설음은 통일된 지 20여 년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이 그렇지만 라이프치히는 특히 예스러움이 잘 보존된 도시다. 구시가지 거리를 빼곡히 차지한 멋스러운 건물들은 전통적인 독일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런 풍경은 비단 시내 중심지역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 라이프치히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유럽 각지로 거미줄처럼 뻗은 중앙역의 철로가 이를 대신 전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중앙역의 전경은 이 도시의 숨은 장관이다. 도심을 달리는 전차, 트램은 옛 유럽의 정취를 한껏 풍기는, 느림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라이프치히의 진가는 누가 뭐래도 종교와 예술의 풍성한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치히 대학은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16세기 초반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마틴 루터의 거점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곳에서 라틴어로만 허락되던 성서를 독일어로 처음 번역했던 그의 행동은 종교적 구습에 정면도전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괴테는 이 도시를 ‘파우스트’의 배경으로 삼았고, 니체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학업에 몰두했다. 괴테가 단골로 삼았던 곳이자 ‘파우스트’에도 등장하는 주점은 지금도 성업 중이다. 이러한 오랜 문화적 전통에 힘입어 라이프치히는 독일 예술, 출판, 인쇄의 중심지로도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도서산업은 세계의 흐름을 주도해 온 지 이미 오래. 1660년 세계 최초의 근대적 일간 신문(라이프치거 차이퉁겐)이 탄생했고 17세기 경부터 시작된 도서 박람회는 지금도 세계 제일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인쇄술과 함께 라이프치히를 대변해 주는 것은 음악이다. 17세기 바로크 음악 시절부터 이 도시로 몰려든 리스트, 바그너, 멘델스존 등 수많은 거장들에 의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음악의 메카로 자리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는 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라이프치히에서 교회음악 보급에 정열을 쏟았다. 라이프치히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성 토마스 교회의 상임 지휘자(칸토르)로 취임한 때가 1723년. 그 후 27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명곡 ‘마태오 수난곡’과 여러 곡의 칸타타를 작곡했다.지금도 이 교회 앞에는 바흐의 동상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맞은편에는 바흐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의 시신 역시 성 토마스 교회에 묻혀 있어 세계의 여행자들이 매일같이 찾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 주변에는 너른 광장과 대규모 쇼핑 아케이드 등이 있는데, 주말이면 광장에는 간단한 간식거리에서부터 식품, 꽃, 기념품, 공예품 등을 내다파는 상인들과 시장도 보고 나들이도 즐기는 사람들이 뒤엉켜 분주한 광경을 연출한다. 이 음악적 전통은 도시 중심가 아우구스투스 광장을 중심으로 도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는 게반트하우스(Gewandhaus)와 오페라하우스에 이어지고 있다. 1981년 문을 연 뒤 음악 홀이 된 게반트하우스에서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토마스 합창단’ ‘라이프치히 소년 합창단’ 등 이 지역 음악 단체들과 세계 유수의 연주자들이 공연을 벌인다. 특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바흐가 죽기 7년 전인 1743년 12명의 상인들로 창단한 세계 최고(最古)의 민간 관현악단이다. 초대 상임지휘자 멘델스존을 비롯해 당대 유명 음악가들이 지휘봉을 잡았고, 현재 유럽 제일의 관현악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이프치히를 찾았을 때 운 좋게도 이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바다의 신 넵튠과 신화속의 신들이 웅장하게 조각된 분수를 지나 들어선 게반트하우스 홀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서는 이들을 압도한다. 중앙에 오케스트라 단상이 놓여져 있고 사방을 돌아가며 객석을 배치한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게반트하우스에서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연주회가 열리는데, 그저 평일일 뿐인 목요일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홀은 청중으로 꽉 찼다. 게다가 하나같이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어 마치 벼르고 벼른 날인 듯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시 관계자는 그다지 별스럽지 않다는 반응이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지역 주민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애써 찾아 온 이들이 매일 이런 광경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인프라는 거대한 연주회장을 짓는 것이 아닌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무거운 진실이 이 평범한 시민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강렬하게 전해졌다. 게반트하우스 교향악단에는 20개의 실내악 앙상블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게반트하우스 바흐 오케스트라’다. 바흐 음악의 완벽한 재현을 목표로 1962년 창단됐다. 이와 더불어 전후 복구사업의 하나로 지어진 맞은편의 라이프치히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정기적인 발레와 오페라 공연이 열려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이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고 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는 예술뿐만 아니라 독일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곳으로서도 가치 있는 곳이다. 그 역사는 성 토마스 교회 가까이 자리한, 고풍스러운 로마네스크 양식에 진한 세월의 흔적을 더한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시작한다. 독일 통일과 자유화에 대한 거센 움직임이 태동하던 1989년. 매주 월요일 성 니콜라스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던 이들을 중심으로 차츰 자유의식이 싹을 트게 된다. 이후 동독 정부의 감시를 피해 라이프치히와 인근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은 정기 기도회를 가장해 매주 월요일 성 니콜라스 교회로 모였고, 차츰 자유에 대한 열띤 토론과 갈망의 장으로 변했다. 이때가 1989년 9월. 기도회가 끝난 뒤면 어김없이 사람들은 촛불을 켠 채 행진을 시작했고, 구동독 시민 무혈 혁명의 기치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렇게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자유와 개혁의 움직임은 월요 촛불 시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비밀경찰과 경찰의 폭력진압, 강제연행 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어졌다. 심지어 라이프치히 외곽을 아예 봉쇄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성직자, 노동자, 시민, 학생 등이 성 니콜라스 교회로 어김없이 모여들었다. 시위 규모는 갈수록 커져만 갔고 자유화의 열병은 구동독 지역 곳곳으로 급속히 감염돼 갔다. 성 니콜라스 교회를 막아서던 경찰과 군인마저 시위에 동참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한데, 결국 구동독의 운명이 기울대로 기울었음을 의미했던 셈이다. 혹자는 예술과 문화로 토대를 쌓아 온 도시였던 덕분에 라이프치히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렬했을 것이라 설명한다.오랜 시간 풍화를 견뎌야 했던 까닭에 장기적인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당시 독일 통일의 열기를 느끼려는 여행자들은 성 니콜라스 교회를 들러 안팎을 둘러본다. 여태껏 만나왔던 예술의 자취와는 또 다른 생생한 역사성에 잠기는 것이다. 한국인 여행자들의 방문이 많지는 않지만 한글 안내문이 있어 교회의 내력을 전한다. 예술과 더불어 산업의 중심지로 수백년간 대접받던 라이프치히는 세계적인 박람회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미 국제 샘플 박람회(1895), 기술박람회(1918) 등이 세계 최초로 개최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공업박람회 등이 꾸준히 열렸는데, 특히 17세기 경부터 시작된 도서 박람회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정치 체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박람회의 전통만큼은 명맥을 이어온 셈인데, 라이프치히와 독일 정부는 여기에서 기사회생의 실마리를 찾았다. 세계 수준의 박람회를 꾸준히 진행하는 것은 물론 첨단 공법이 집약된 세계 최대 규모의 박람회장, 노이에 메세(Neue Messe)를 건설하기도 했다.1996년 문을 연 뒤 도시 외곽에서도 한눈에 발견될 만큼 웅장한 규모로 라이프치히의 새로운 상징이 된 이곳에서 자동차 박람회, 도서 전시회, 재활용품 박람회 등은 물론 최근에는 세계 3대 게임 쇼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한 라이프치히 게임 쇼에 이르기까지 분야와 규모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세계적인 수준의 박람회가 이어진다. 과거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만 힘쓰기보다는 이를 현대적인 필요에 맞추는 지혜가 발휘된 것이다. 어쩌면 반세기 동안 라이프치히에 대한 기억이 없었던 우리들에게 라이프치히는 예술과 문화의 전통보다는 정작 박람회와 월드컵의 도시로 새롭게 각인될지 모를 일이다. 오랜 익숙함은 때로는 그 속에 숨은 참 맛을 지나치게 한다. 지난 몇 년 사이 사정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구동독 지역으로의 여행은 그다지 기껍지 않다. 정치적인 이유로 라이프치히를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겨내는 것은 뒤늦은 우리의 숙제다. 이미 세계의 산업, 문화, 예술계는 이 도시의 오랜 내공을 믿어왔고, 또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