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의 명수’ 커크 커코리안의 부자지도

“나는 도박사일 뿐이고 내 인생은 한편의 도박이다.”(커크 커코리안, 2005년 6월 LA타임스와의 인터뷰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공의 길은 언제나 멀고 힘들다.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미국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세기의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커크 커코리안(89)의 성공 스토리도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그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신문팔이 등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변변한 대학조차 나오지 못했다. 같은 부자라도 그에게선 윈도 하나로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의 지도를 바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나 가치 투자라는 개념으로 주식 투자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워런 버핏에게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찾기는 힘들다.그는 다소 경멸적인 의미의 ‘기업 사냥꾼’으로 불릴 뿐이고 억만장자가 된 것도 라스베이거스에서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불린 데 따른 것이다. 그리고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인생은 언뜻 보기에도 도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결국 87억 달러(약 8조2000억 원)의 재산을 모아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53위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또 아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왕성하게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그는 최근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의 경영 개입으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GM의 4대주주로 9.9%의 지분을 보유한 그는 지난 6월 30일 릭 왜고너 GM 회장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르노-일본 닛산과 제휴하라고 요구했다. 르노와 닛산이 각각 GM 지분 10%씩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공룡 자동차 그룹을 만들자고 제안, ‘조커’로서의 본심을 내보인 것.르노와 닛산은 이미 관심을 표시하고 나섰고 GM도 커코리안의 제안을 고려해 보겠다고 밝힌 상태다. 커코리안의 제안이 성사되면 미국-유럽-아시아를 잇는 연간 생산대수 1500만 대, 세계 시장점유율 25%의 초대형 자동차 메이커가 탄생하게 된다. 커코리안은 1917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스노라는 곳에서 아르메니아 출신 이민자 가정의 막내(넷째)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좋지 않았다. 아홉 살 때부터 신문팔이를 해야 했을 정도다. 그는 나중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수성가하려면 아주 일찍부터 (뭔가를) 시작하라. 그러면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에 비해 더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삶은 즐거움보다 고달픔이 컸을 것이다.고등학교 때는 프로권투 선수인 형의 코치를 받아 권투를 배웠고 아마추어 웰터급 챔피언 타이틀을 따는 등 ‘강펀치’를 자랑하기도 했다. 잠시 프로 권투 선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스물두 살 때 그는 시간당 45센트의 급료를 받고 벽난로 설치 일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비행기를 접하게 됐고 이 때부터 그의 인생 항로가 바뀌기 시작했다. 1940년 6개월의 조종사 교육을 받고 파일럿 자격증을 딴 그는 전투기 조종사 교관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곧 싫증을 느끼고 캐나다 공군 기지에서 영국 스코틀랜드까지 대서양을 횡단해 전폭기를 수송하는 일을 맡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의 일이었다. 적기에 격추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한밤중에 실종 사고가 적지 않은 항로였고 덕분에 그는 폭격기를 한번 수송할 때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1000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1947년 공군에서 제대한 그는 비행기 한 대를 구입해 1주일에 2~3번 LA에서 라스베이거스를 운항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항공기 몇 대를 가진 조그만 항공사(LA에어서비스)를 인수했고 1965년에는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그는 1968년 이 회사를 8500만 달러를 받고 트랜스아메리카항공에 매각, 짭짤한 수익을 남겼다.하지만 커코리안의 인생에서 성공의 키워드는 비행기가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였다. 라스베이거스와의 인연은 1945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아침식사 값 5달러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그는 근처의 주사위 게임장에 갔고 순식간에 700달러를 땄다. 그는 도박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하루에 5만~8만 달러를 잃을 때가 많았고 나중에는 카지노 출입을 끊어야 했다.라스베이거스와의 또 다른 인연은 결혼. 그는 이곳에서 댄서로 일하던 진 맥리 하디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고 둘 사이에 트레이시(Tracy)와 린다(Linda)라는 딸을 낳게 된다. 나중에 그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자신의 투자회사 이름을 두 딸의 이름을 따 트래신다(Tracinda)로 지었다.1962년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그의 운이 트이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는 당시 96만 달러의 돈으로 라스베이거스 땅 80에이커를 사들였다. 말이 라스베이거스지 그 때까지만 해도 막막한 사막(네바다 사막)으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의 투자는 적중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점점 ‘도박의 도시’로 알려지게 됐고 그는 땅 임대료로 400만 달러를 번 뒤 1968년 이곳에 시저스팰리스 호텔을 지으려는 제이 사르노란 사람에게 500만 달러를 받고 땅을 매각했다. 6년 만에 투자 원금을 9배 이상으로 불린 셈이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나중에 이를 “라스베이거스 땅 투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례 중 하나”라고 치켜세웠다.이후 그의 투자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순항을 거듭했다. 1969년 6000만 달러를 들여 당시로선 세계 최대인 인터내셔널 호텔(객실 1500여 개)을 지었고 3년 뒤에는 이 호텔을 힐튼호텔그룹에 1억 달러를 받고 팔아 넘겼다.커코리안은 1993년 10억 달러를 들여 다시 MGM그랜드 호텔이란 이름을 단 호텔을 오픈했다. 이번에는 객실 규모가 5000여 개나 됐다. 또 1997년에는 3억5000만 달러를 투자해 객실수 2100여 개의 뉴욕뉴욕 호텔을 열었다. 잇따른 호텔 건설로 그는 ‘라스베이거스 대형 리조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금도 세계 최대 카지노·호텔 운영체인인 MGM미라지의 최대 주주로 군림하고 있다.그는 영화에도 손을 댔다. 1969년에는 MGM스튜디오의 주식 40%를 인수했고 1981년에는 유나이티드아티스트(UA)를 3억8000만 달러에 매입했다. UA의 경우 1986년 이탈리아 회사에 13억 달러를 받고 팔았다. 커코리안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잇따른 성공에 대해 “나는 그저 운 좋게 투자대상을 잘 찾아냈을 뿐이고 5만 달러만 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몸을 낮췄다. 하지만 그는 단지 운이 좋은 것 이상이었고 자신이 생각한 행복의 기준선을 훌쩍 뛰어넘었다.1990년대 그는 또 한번 변신을 시도한다. 그 때까지 라스베이거스 개발 사업에 집중하던 그가 돌연 월가(미국의 금융가)로 눈을 돌려 자동차 산업에 입질하기 시작한 것. 그는 이 과정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 빅3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의 최대주주로 떠올랐고 1998년 독일 다임러벤츠에 팔리기 전까지 최대 주주로서 경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크라이슬러 최고경영자(CEO)였던 리 아이아코카 회장은 커코리안에 대해 “그는 육감을 지닌 타고난 도박사로, 투자 가치를 알아내는 데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크라이슬러 투자를 계기로 그는 최근 KT&G에 대한 경영 참여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칼 아이칸과 함께 1세대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세를 타게 됐다.지난해부터는 GM을 타깃으로 모두 14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후 GM 이사회에 배당금 축소 등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올해 초 자신의 심복인 제롬 요크를 GM 이사로 선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기업 사냥꾼 이미지 뿐만 아니라 또다른 ‘얼굴’을 갖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조국인 아르메니아에선 국가적인 영웅 대접을 받는다. 자신의 자선재단인 린시재단을 통해 아르메니아에 1억8000만 달러 이상의 돈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그 돈은 아르메니아에서 40km 길이의 고속도로 건설과 1988년 대지진으로 피해를 본 지역에서 3700여 가구의 아파트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그 공로로 그는 2005년 5월 아르메니아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최고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