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와인의 역사
정이란 바친다는 뜻이다. 곡을 지어 바치면 헌정곡, 시를 써 바치면 헌정시가 된다. 음악이나 문학, 미술 등 예술 분야에는 이러한 헌정 작품들이 많다. 와인 중에도 헌정 와인이 있다. 와인 생산자가 기념될 만한 인물이거나 와인 생산에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바치기 위해서다. 가령 이탈리아 와인 중에는 ‘카를로를 위하여’라는 뜻을 가진 ‘페르카를로’가 유명하다. 이 와인은 토스카나 지방 키얀티 클라시코에 있는 포도원 산 주스토 아 렌텐나노의 레드 와인이다. 1981년 세상을 떠난 카를로는 포도원 주인의 먼 친척으로 포도원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산 주스토 아 렌텐나노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이 와인을 페르카를로라고 정했다. 이 와인은 맛과 향에서 화려함은 없지만 정결함과 경쾌함이 넘치며 간결하지만 응축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페르카를로는 이탈리아에서 토종 포도로 빚어낸 와인 중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밖에 키얀티 클라시코의 포도원 카사로스테에도 헌정 와인이 있다. ‘빈첸조님’을 뜻하는 돈 빈첸조. 빈첸조는 카사로스테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나폴리 출신의 바티스타 도로시 부부는 부친 빈첸조의 지원 속에 키얀티 클라시코에 포도원을 마련했다. 숙성 기간이 긴 리세르바로 1995년부터 와인을 생산해 이를 부친에게 바쳤다. 바티스타 도로시 부부의 노력은 2001년 산 돈 빈첸조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감베로 로소의 와인 평가에서 돈 빈첸조 2001년 빈티지는 ‘트레 비케리’를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트레 비케리는 ‘글라스가 세 개’라는 뜻으로 매년 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에 주는 상이다.돈 빈첸조(VincEnzo)의 라벨에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옆얼굴이 있고 그 사이에 포도원 주인 조반니 바티스타 도로시의 사인이 있다. 할아버지의 뜻을 2세(아들)가 잘 받들고, 그 뜻을 손자에게 잘 연결하겠다는 다짐이다. 돈 빈첸조는 1.5헥타르의 작은 포도밭에서 나온 산지오베제만을 가지고 만들며 한번도 쓰지 않은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8개월간 숙성한 후 병에 담는다. 병에 담은 후에도 1년 이상 숙성 과정을 거친 뒤 시장에 선보인다. 프랑스에도 헌정 와인이 많다.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쉴드는 여러 종류의 헌정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로쉴드의 영어식 발음은 로스차일드. 로쉴드는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정착촌에서 태어나 유럽의 대표적 명문가로 성장한 마이어 암셀 로쉴드의 5형제를 뜻한다. 샤토 무통 로쉴드의 오너인 필리핀 로쉴드 여남작은 이러한 조상의 유업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헌정 와인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론 칼은 생테밀리옹이 원산지인 와인으로 5형제 중 4남이었던 칼에게 헌정됐다. 생테밀리옹은 석회암 지대에 포진한 포도밭으로 강 건너편에 있는 메독과는 달리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이 많이 재배된다. 따라서 생테밀리옹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텁텁하고 거칠기보다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느낌을 준다. 바론 앙리는 메독이 원산지인 와인이다. 필리핀 여남작의 직계 할아버지다. 메독은 지롱드 강 하류에 자리 잡아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자갈들이 많다. 때문에 자갈들이 많은 토양은 배수가 뛰어나 포도 재배에 유리하다. 또 밤에는 자갈이 낮 동안 흡수한 열을 발산해 일정 온도를 유지하게 한다. 바론 나타니엘은 앙리의 할아버지이자 필리핀 여남작의 고조 할아버지다. 그는 뛰어난 사업가로 1853년에 샤토 무통 로쉴드를 매입했다. 바론 나타니엘 와인의 원산지는 포이약이다. 포이약은 보르도에서 가장 우수한 포도밭이 있는 마을이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혼합해 만든 바론 나타니엘은 숙성력이 뛰어나다. 바론 나타니엘은 1등급의 샤토 무통 로쉴드와 5등급의 샤토 달마이약, 샤토 클레르 등 유서 깊은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다. 매년 새로운 라벨을 병에 붙이는 샤토 무통 로쉴드는 2003 빈티지에 바론 나타니엘의 초상화를 새겨 그의 공적을 기렸다. 이는 바론 나타니엘이 샤토 무통 로쉴드를 구입한 지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뜻에서다. 바론 샤를로트는 원산지가 그라브인 화이트 와인이다. 수채화가로 유명했던 샤를로트는 나타니엘의 사촌 형수였다. 이 와인은 청포도의 일종인 세미용과 소비뇽 블랑, 뮈스카델을 혼합해 달지 않게 만든다. 프랑스 남부에서는 샤토 보카스텔이 유명하다. 론 강 유역에 길게 포진한 론 밸리에서 샤토 보가스텔은 최고의 와인 생산자이다. 보카스텔의 헌정 와인은 샤토뇌프 뒤 파프 오마주 아 자크 페랭으로 원산지는 샤토뇌프 뒤 파프이며, 그르나슈, 무브드르, 시라 등을 사용한다. 오마주는 ‘존경’이란 뜻으로 오마주 아 자크 페랭은 ‘아버지 자크 페랭을 추모한다’는 뜻이다. 1978년에 세상을 떠난 보카스텔의 오너였던 자크 페랭을 기념하는 이 와인은 빈티지가 훌륭할 때만 생산하는 고급 와인이다. 샴페인에도 헌정 와인들이 있다. 여러 품종의 포도즙을 섞어 만들어야 샴페인의 맛이 더 좋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 수도사에게 헌정한 동 페리뇽은 세계 최대의 샴페인 회사인 모에샹동의 최고 브랜드다. 샴페인 회사 뵈브 클리코 퐁사르댕의 최고 브랜드인 라 그랑 담(위대한 여성)은 양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포도 찌꺼기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이 회사의 전 오너 클리코 퐁사르댕을 기리며 만든 와인이다. 한편 미국에는 사람이 아니라 포도 품종에 대해 헌정한 와인이 있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 클로 페가스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샤르도네 품종을 기리며 헌정 와인인 ‘하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