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나에게는 가깝고도 먼, 알 듯 모를 듯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땅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경주는 신라의 고도이자 화랑과 귀족의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곳이고, 또 다른 경주는 휴양지이자 관광지다. 경주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유적이요 보물이어서 볼수록 흥미롭다. 남산의 흩어진 불상 조각의 흔적을 찾아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헤맸고, 분황사 안압지 천마총 유적도 여러 번 보았다. 황룡사지 발굴로 장대한 규모의 주초와 유구에 놀라워했으며, 첨성대의 천문과학이나 포석정의 풍류, 계림의 고사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래도 경주는 새롭다. 어느 날 나는 토함산 남쪽 괘릉(掛陵)의 서역인(西域人) 무인석상과 당인(唐人)의 문인석상, 그리고 미감이 수려한 사실적 조각의 네 마리 돌사자를 보고 놀랐다. 어떻게 신라 당시 이런 멋진 조각상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디 그뿐이랴. 경주고분출토서역 포도주잔 같은 유리제품, 신라 금령총 출토 도제기마인물상(국보 91호)의 말 탄 서역인의 얼굴 및 용강동 고분에서 나온 서역인 토용, 서역의 보검 등 참으로 많은 서역 유물을 보면서 궁금증이 더했다. 의문의 해답은 간단하다. 신라 경주는 서역에서부터 출발한 실크로드가 당나라 서안을 지나 동쪽 끝으로 이어지는 국제 무역로의 종착지이자 국제도시였다. 역사는 흘러가고 흘러온다. 내가 서 있는 현재야말로 가장 진보된 역사의 한 점이다. 때문에 지금보다 뒤처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지금보다 덜 문명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꼭 맞을까. 당시의 신라는 최신의 문명과 과학을 지닌 문화국이었다. 신라에 들어가 보자. 화랑의 굳센 기상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나아가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워 통일을 이룩한,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문화국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추리의 근저에는 언제나 당시의 실상에 대해 궁금함을 자아내게 한다. 황룡사, 그 거대한 건축을 어떻게 해냈을까. 신라 승려 혜초(704~780)는 어떻게 열여섯 살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나 인도를 거쳐 이란에 이르는 그 먼 여정을 육로와 해로로 다녀왔을까. 장보고의 해상 제패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경주 괘릉에 보이는 서역인은 어떻게 들어 왔을까. 석굴암은 과연 신라 재상 김대성이라는 걸출한 장인의 노력만으로 지어졌을까. 첨성대는 천문대 역할뿐만 아니라 신라인의 불국토를 이루려는 일종의 상징 조형물은 아니었을까. 의문은 끝없다.경주는 당나라 수도 장안의 도시 계획을 본받아 왕궁의 후원에 시장을 형성하고 주거 토목 관개시설 등의 도시계획을 실시했다. 당시 경주에는 가옥이 17만8000호 있었다. 따라서 경주는 한 집에 어림잡아 네 명만 계산해도 70만 인구가 사는 국제 도시였다. 경주, 즉 계림은 당시 서안에서 시작한 실크로드의 동쪽 끝 정착지였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천축(天竺, 인도)에서 온 밀교승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밀교를 처음 접한 다음 스승의 권유로 ‘떠날 때는 백 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어려운 천축으로의 장도에 오른 것이 723년. 광저우를 떠나 뱃길로 동천축에 도착한 후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4년간 인도를 비롯한 서역 여러 곳을 여행한 후 당나라로 돌아와서 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야말로 신라인의 서역 진출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문물이 당나라를 건너 신라로 흘러 들어온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주 출토 금관에 보이는 출(出)자 모양의 금관은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와 연결된 유목민의 나무 숭배 문양에서 연유된 것으로, 신라의 고도로 숙련된 금 세공 기술과 맞물려 이루어낸 것이다. 5~6세기 신라에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황금 유물이 엄청나다. 신라는 문자 그대로 ‘금관의 나라’다. 이러한 중앙아시아적 영향은 감은사지 출토 사리장치에서도 그 일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감은사지 사리장치에는 허리에 차고 춤추는 요고(腰鼓)라는 장구가 보이는데 이는 중앙아시아의 악기로, 우리가 이즘에 사용하는 장구보다 크기가 사뭇 작다.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신라의 가면극인 사자 탈춤도 실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축제나 국경일에 즐겨 추는 서안 지역의 전통춤으로 신라에 건너온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파돼 온 결과다. 이러한 서역 문화는 배를 통해 들어오기도 하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전쟁을 통해 일시에 유입되는 경우다. 660년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단순히 백제 의자왕의 무능으로 신라의 화랑에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실은 나라를 구하고자 안간힘을 다한 국제전이었다. 즉,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은 서로 부족한 힘을 모으려고 합종연횡책을 썼다. 남북으로는 고구려 백제 일본이 연합하고 동서로는 신라와 당이 손을 잡았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당시 20만의 군사와 2000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 전쟁에 동원된 당나라 군사가 한족(漢族)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과 서역의 용병들도 따라왔다. 서안에서 출발한 군대는 당시 실크로드 무역의 중심지였던 서안의 서역인들도 동원됐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사람이 움직이면서 문물과 문화가 함께 들어온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룬 통일신라의 계림 경주에는 이때부터 서역인의 자연스러운 활보가 시작됐다. 이러한 서역인은 용병 역할을 했고 눈이 크고 체구가 장대한 그야말로 검투사와 같은 든든함을 두루 갖췄다. 경주 괘릉에 서 있는 무인상의 조각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조각상은 당시 서역인의 모습을 계림에서 보는 것이 지금의 서울 거리에서 보듯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를 조각하는 장인들도 세인의 얼굴에 이상하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방망이는 언뜻 보면 우리 전래동화에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불의 화신 프로메테우스가 들고 있는 방망이와 똑같은 조형을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계림에서 출토된 보검에 새겨진 보상화문은 중앙아시아의 무늬로, 현재 이란의 카펫 무늬와 똑 같다. 신라의 향가에 나오는 처용의 모습이 신라인이 아니라 서역인의 얼굴을 한 주인공이라는 것도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아무튼 신라의 계림은 당나라인 서역인 신라인 백제인 고구려인 등 여러 지역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국제도시였다. 경주에는 사자가 없다. 사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국사 다보탑을 에워싸고 있는 사자상이나, 괘릉 성덕왕릉 흥덕왕릉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석사자의 장대한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시 서역 문화의 단면을 본다. 이는 불교를 통해 들어온 당나라와 인도 승려들이 불교에서 사자의 상징성을 알리고 사자 조각 샘플을 보여주고, 그런 가운데 걸출한 승려가 실제로 사자상을 조각해 다듬는 기술을 보여줌으로써 사자 조각의 원천 기술을 고스란히 신라 장인이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상상만으로는 사자상을 조각할 수 없고, 그 실체를 본 인도나 서역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고유의 힘이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에 얼마나 많은 중국 문물과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는가는 최치원의 당 유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치원은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당 유학을 떠난다. 그는 육두품 출신 아들로, 이미 당으로 유학 가기 전 경주 계림에서 당의 문물을 충분히 접했다. 그리고 신라 배를 타고 상하이 부근 경원에서 내려 육로로 천리 길을 걸어 서안까지 당도한다. 서해 바다를 건널 때는 요즘같이 혈혈단신으로 건너는 것이 아니라 당시는 하나의 군단을 형성하여 건너갔다. 이는 바다에서 해적을 만날 수 있는 개연성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당나라행은 어쩌면 신라 국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그가 서안에서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은 그야말로 신라의 국력이 국제화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하다.신라는 당시 세계적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 석굴암이다. 8세기 중엽에 건립된 석굴암은 당시 신라 왕실의 부의 힘으로 이루어낸 결정체이다. 석굴암 석재는 화강암으로 울산 부근 입실에서 가져왔다. 화강암은 매우 단단해 섬세하게 조각하기가 아주 힘든 재질이다. 인도나 중앙아시아 및 중국 돈황의 석굴사원의 재료인 사암이나 석회암 대리석은 굴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직접 조각해 석굴을 조영하나, 경도가 강한 화강암이 대부분인 신라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신라인은 실정에 맞게 창의성을 발휘해 산을 파내어 돌을 다듬어 굴을 만들고 조각된 불상을 조립한 다음 흙을 덮는 미증유의 공법을 창안했다. 이렇게 석굴암은 여타 지역의 자연석굴과는 다른,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인공 석굴이며 짜임식 건축물이다. 석굴암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계 유민이 대거 신라로 유입되면서 백제의 뛰어난 기술과 신라의 경제력이 맞물려 이루어낸 작품이다. 이것은 마치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자 백제의 지배 계급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과 같은 사례다. 경주의 서역인 자취를 찾아 흥덕왕릉 가는 길, 유월 밤꽃이 늦깎이 꽃을 피워 연분을 진하게 흩날린다. 차가 경부고속도로 추풍령을 넘으니 산하가 여름으로 가득하다.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서포항 인터체인지를 벗어나면서 풍경이 경주로 바뀐다. 흥덕왕릉 이정표를 따라 한가한 농촌 풍경 속에 허름한 입간판이 보인다. 이곳이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릉, 입구는 허름하다. 호기로운 서역 무인상을 보고 싶은 마음보다 더 마음을 빼앗은 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경주에는 소나무 숲이 유별나게 많다. 남산 삼릉골 솔숲도 그렇고 괘릉의 소나무도 아름답다. 그뿐 아니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앞 소나무는 말할 것도 없고, 다보탑 뒤로 보이는 소나무의 자태는 정말 고색과 어울려 창연하다. 흥덕왕릉 솔숲사이로 지는 석양빛을 받으며 한참을 오르니 거기 석양에 서역 무인상이 천년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노송을 배경으로 서 있다. 감동이다. 괘릉의 우락부락한 서역 무인상과는 조금 다른 약간 풀 죽은 모습이지만 무인으로서의 기상은 여전하고 그의 도깨비 방망이도 왕릉을 지키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곁에는 당나라 문인석이 조복을 갖추고 단정히 서 있고, 무덤 주위로 서역 수입산 돌사자 네 마리가 당당히 지키고 있다. 지난달 초 여름비 내리는 새벽에 보았던 괘릉의 무인상이나 사자, 그리고 문인상 화표석 등등 모두 내게 새로운 미감과 감동을 주었는데 오늘 다시 그 새로움을 확인하니 감동이 벅차오를 뿐이다. 아련히 경주 저잣거리 넘치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