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휴머니스트 김학원 사장의 인생 이모작

판사 휴머니스트의 김학원 대표(45)는 흔히 회자되는 ‘성공법칙’의 이단자다. 출판 업계에 첫 발을 내디딘 계기부터 휴머니스트 창업 스토리까지 도무지 관행의 흔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세 번의 옥살이를 한 골수 운동권이었다. 1991년 그는 전국지방공기업노동조합연맹(전공노련)의 정책실장을 그만 두면서 6000만 원의 빚을 졌다. 주로 유인물 제작비로 충무로 인쇄소에 달아 둔 외상값이었다. 무급이었던 노동단체 임원들은 소요 경비를 능력껏 조달하던 시절이었다. 빚을 남겨두면 후임자에게 ‘신용불량’을 넘겨줘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드는 셈이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한 선배가 새길 출판사에 일자리를 소개했다. ‘2년 일하면 빚을 갚아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새길 대표는 반년 만에 빚을 다 갚고 매달 20만 원의 월급까지 지급했다. 감복한 김 대표는 회사에 기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알아야 공을 세울 터. 출판 등 관련 업종에 있는 선후배 인맥을 총동원해 조사 방법, 교정 및 출판 기획 등을 배웠다. 주말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서점 시장조사를 벌이는 강행군을 벌였다. 김 대표가 첫 3개월 동안 올린 기획은 총 100종. 그 가운데 결실을 본 책이 ‘지혜가 드는 창’ 시리즈다. 1993년 7월 이진경의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을 필두로 석 달 뒤 다섯 번째 시리즈 안효상의 ‘상식 밖의 세계사’가 히트를 치며 10만 권 이상 팔렸다. 이듬에 1월에 출간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1994년 1월), 11월에 나온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지금도 개정판이 꾸준히 팔릴 만큼 10년 이상 장수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혔다. 여기에 힘입어 500만 원 전후였던 새길의 월 수금액은 단번에 2억 원으로 뛰어올랐다. 빚 갚을 요량으로 출판계에 잠시 들어왔던 김 대표는 어느새 스타가 돼 버렸다. 1994년 12월 ‘푸른 숲’ 편집주간으로 이직한 그는 번역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스타 출판 기획자로 입지를 굳힌다. 아쉬운 게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마흔에 접어들자 김 대표는 “이대로 가면 괴어 있을 것” 같은 근본적인 한계점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편집자로서 무르익은 경험과 감각을 맘껏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연간 발간되는 새 책은 약 4만종에 달합니다. 출판업은 가장 많은 종류의 신제품을 쏟아내는 업종이라 할 수 있죠. 여기서 비즈니스로 성공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봅니다.” 김 대표는 그런 출판 업계에서 인생을 걸고 싶었다. “최악의 경우 월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아내의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됐다. 2000년 12월 13일, 마흔을 보름여 남겨둔 시점에 그는 사표를 냈다. 이틀 후인 12월 15일 가족과 함께 해외 여행길에 올랐다. 머리를 비우고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주로 유럽과 아시아 국가를 배낭 여행했다. 필리핀에서 민박하며 현지인처럼 지내다 다음 여행지를 선택해 또 민박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4개월을 다니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르기 나흘 전 한국에 돌아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공백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출판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 양질의 저자 인맥이라고 봤을 때, 바로 회사를 차리면 전 직장에서 쌓은 저자 인맥을 손쉽게 끌어 쓰는 창업이 될 것 같았어요. 도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 직장보다 못한 아류 출판사를 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밑바닥부터 새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다. 자금에 관해서는 ‘남의 투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6000만 원 빚에서 출발해 10여년 만에 마련한 내 집을 처분했다. 전세금 등을 제외한 뒤 손에 쥔 자금은 총 1억5000만 원. 보통 3~5억 원을 갖고 시작하는 출판 업계 평균으로 봤을 때 부족했다. 그래서 ‘예비비’를 확보해 뒀다. ‘내 자금’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는 가족들의 도움을 미리 요청해 둔 것. 우선 사업 계획서를 들고 부친을 찾았다. 2년 안에 갚겠다는 단서를 달아 위급할 때 부친의 집 담보 대출로 사업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부친과는 결혼 때 3000만 원을 빌렸다가 만기에 갚은 ‘신용’이 있었다. 형에게도 만일의 경우 최소한 3000만 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1억5000만 원 자금에 예비비 1억 원 정도를 확보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와 마련한 첫 사무실은 친분 있던 출판사의 책상 하나였다. 당초 월세 20만 원씩 내겠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출판사 측에서 받지 않았다. 김 대표가 편집회의에 참석해 기획위원 역할을 해 주는 것으로 월세를 갈음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집(일산)을 나섰다. 자동차도 없앤 터라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마포 사무실에 도착하면 7시였다. 그렇게 석 달 동안 사업 구상을 하면서 그가 쓴 돈은 월 50만 원. “편집주간 시절, 매년 전국의 서점을 샅샅이 돌았습니다. 좋은 기획은 현장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서점과 도서관은 기획 아이디어를 얻고 다듬는 최고의 현장입니다. 전국 곳곳의 100평짜리 서점 매대 모습까지 머리 속에 선할 정도였죠. 그때마다 책 얘기를 나누곤 했으니 전국에서 저를 모르는 서점 관계자는 없었습니다. 평소 300~400여 명의 출판 편집장들과도 활발히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습니다. 사업 기획을 하는데 그 인맥과 그들의 의견이 큰 자산이었습니다. 모두 제 자문위원들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최소의 활동비로도 내용이 풍부한 기획 방향을 잡을 수 있었죠” 그 결과를 들고 2001년 5월 8일, 드디어 ‘휴머니스트’의 간판을 내걸었다. 출판 원칙은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기초 교양을 튼실하게 해주는 책을 만들자.’ 대개 출판사를 차리면 자금을 회전시키기 위해 번역서 등 비교적 쉽게 낼 수 있는 책을 많이 돌린다. 그런 물렁살 부실 성장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탄탄한 출발을 위해 5월 공식 창업 이후에도 7개월 동안 책 한 권 내지 않았다. 대신 이전부터 구상해 왔던 책 40~50여 권을 집중적으로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리고 12월, 첫 책으로 동양과 서양의 대표 철학자 두 명의 대담집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메일을 주고받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신선한 화제를 일으켰지만 금전적으로는 손해를 봤다.첫 책의 손실에다 좋은 책 만들 욕심에 계획보다 많은 돈을 책 개발비에 쏟은 탓에 자금 압박이 시작됐다. 예비비로 약속해 둔 부친의 집 담보대출과 형님의 도움까지 다 받았지만 5000만 원이 부족했다. 돈 꾸러 친구한테 갔다가 입도 떼지 못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결국 사정을 알게 된 거래 인쇄업체 사장의 융통으로 책을 낼 수 있었다. 휴머니스트는 첫 책 이후 2002년 5월까지 반년간 내리 11권의 책을 쏟아낸다. 번역서는 단 2권뿐이었다. 그 중에는 2002년 3월, 7번째로 출간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2’는 대히트를 쳤다. 후속으로 나온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2권’ 역시 ‘올해 최고의 출판기획물’에 선정되는 등 4종의 교과서 시리즈는 3년 반 동안 60만 권 이상 팔려나갔다. 자연과학계 거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인문학을 대표하는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대담’(2005년)은 지난해 KBS ‘TV책을 말하다’를 비롯해 중앙, 동아, 한겨레 등 수많은 언론사 및 기관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책’을 휩쓸기도 했다. ‘마케팅’이 게임의 규칙이 돼 버린 시장에서 ‘책의 품질’에 매달리고, 성공 처세서의 시대에 ‘인문서’로 승부를 건 김 대표. 업계 상식과 반대로 간 그의 창업 스토리는 대중에 휩쓸리지 않고 ‘소수의 길’을 걸을 때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둔다는 투자 격언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