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젊은 화가 변선영의 미학세계
교 신도시 개발이니, 강북 재개발이니 하는 신문 기사 때문일까. 집이라고 하면 마치 어려서 불렀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로 이어지는 노래처럼 ‘집은 아파트, 아파트는 재산 증식’ 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연상된다. 이런 현실적인 면을 한 꺼풀 걷어내고 심정적인 의미를 따지자면 집은 최고의 안식처이자 자신을 보호해 줄 최후의 보루 등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작 집이라는 것이 한량없이 넓은 부처님 마음처럼 보듬어 안아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가족간의 갈등과 다툼이 엄연히 존재하게 마련. 집을 그리는 작가 변선영은 이 점을 주목한다. 그녀가 집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전시회 때부터다. 홍익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1997년 미국 미시간 주 크랜브룩 아카데미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였다. “화가의 작품 속에는 개인적인 이야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기게 마련이죠. 당시 상황이 집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부모님과 함께 지낼 때나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을 할 때는 그런 것에 관한 개념이 없었어요. 그런데 서울로 돌아와서 살 집을 구하고, 아기를 낳는 등 현실적인 삶으로 들어서 보니 집과 가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초기에는 집의 외관을 주된 소재로 삼았고 회화 기법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전 전시의 주제가 ‘홈 앤드 하우스’(home & house)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집의 외부 형태를 그리지만 작품을 통해 집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공간인 동시에 여러 가지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해석했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지만 최근에는 보여주는 방법에 변화를 주었다. 아크릴 물감만을 사용해 그리고 실내로 시선을 옮긴 것이다. 지난 5월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품은 집 안의 일상적인 풍경을 묘사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쿠션이 놓여 있는 소파, 콘솔 위에 올려진 화병,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등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특징적인 것은 이런 공간 속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컨대 세잔, 미켈란젤로, 샤갈 같은 대가가 그린 명화가 걸려있다는 것. “카페나 식당 어디를 가든 흔히 걸려 있는 그림 있잖아요. 밀레의 ‘이삭줍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같은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는…. 사실 (진품이 아닌 인쇄물로라도) 곁에 두고 감상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걸려 있는 것으로서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은가요.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거장의 작품이라는 것으로 가치를 매김 하는 것이죠.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는 옷처럼 무의미하게 벽에 결려있는 명화와 가정이라는 의미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집이라는 것이 재산 증식의 수단, 소유의 개념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가정은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현실적 갈등의 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모순된 점을 가지고 있죠. 말하자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명화는 모순(矛盾)을 상징하는 오브제인 셈이랍니다.” 보색 또는 여백과 강렬한 색면이 대비되는 그녀의 작품을 대면했을 때의 첫 느낌은 예쁘다는 것이다. 이런 색채의 결합은 집과 가정에 대한 대립적인 개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양식 집안 구조에 전통적인 패턴이 들어가 있는 동양적인 가구를 대치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작가는 일상적인 집과 그 집 안에 있는 벽, 걸려 있는 그림, 오래된 가구 같은 평범한 소재를 세밀한 드로잉과 강한 색상으로 재현하여 눈에 띄는 다른 물건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패턴을 섬세하게 그린 벽지, 문양을 자세하게 그려 넣은 고가구, 화병 밑에 깔려 있는 레이스 뜨개 등을 보자면 이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사실적 묘사와 색감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 집 거실이나 방에 도배하고 싶을 정도로 예쁜, 그림 속에 그려진 벽지 문양은 기존의 제품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닌 작가의 순수 창작품.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그린 그녀의 작품을 보다보면 점점 더 그림 쪽으로 다가가게 된다. 오브제의 세밀한 묘사는 펜촉에 아크릴 물감을 찍어서 그린 것이라고. 펜촉에서 물감이 흘러내려야 하므로 그림을 그릴 때 펜과 캔버스 면과의 각도는 90도를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이젤에 캔버스를 세워두고 스툴에 앉아서 붓으로 색을 칠하는 일반적인 화가의 모습과 변선영이 작업하는 모습은 차이가 있다. 바닥에 놓고 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 환경은 최악이다. 게다가 아크릴 물감이 빨리 굳어지기 때문에 휴지로 펜촉을 수시로 닦아가면서 하다보니 작업을 마치고 나면 주변에 휴지 뭉치들로 수북하다고. “4~5년 전만 해도 소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다양한 재료를 써서 작업을 했어요.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느라 동대문 시장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죠. 현대 미술은 재료의 다양성에 중점을 두니까 저도 늘 색다른 재료를 추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주객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만히 보니 작업하는 것보다 재료를 찾아다니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거예요. 제가 다루지 못하는 소재를 활용할 때에는 기술자의 손을 빌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형상화해야 하는데, 생각한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도 않고…. 내가 그런 기술력이 없다면 하지 말자 생각하고 제가 좋아하는 드로잉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죠. 펜촉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작업하는 것이 신체적으로는 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더 즐겁답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