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일지암
라도의 들녘은 평화롭다. 군산 금강하구언 방조제를 지나 김제평야에 이르니 오월 모내기철 여기저기 녹음이 완연하다. 초여름 풍경 속에 백로가 한가롭다. 부드러운 논둑 사이로 맑은 물이 넘치고 물풀이 가늘게 물결에 흔들린다. 어린 송사리 떼 작은 웅덩이 한가롭게 노닐고, 하늘에는 종다리 울음소리 푸르게 흩어진다. 한반도의 산과 강, 들은 참 풍요롭다. 가는 곳마다, 눈길 닫는 곳마다 작은 마을이 푸른 산과 너른 들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어울려 있다. 인심은 산맥과 물줄기로 확연히 구분지어 언어와 풍습을 달리하니, 반도의 작은 땅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문화가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멋과 풍류의 전라도 문화다. 그 풍류의 중심이 해남 강진 같은 남도의 끝자락이다. 그곳은 조선 오백년 역사 가운데 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자 모진 유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한국 차 문화의 고향인 일지암(一枝庵)이 있다. 조선 후기 초의(草衣, 1756~1866)라는 걸출한 선승(禪僧)이 해남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경내에 일지암이라는 초암을 짓고 차나무를 심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차의 원형을 복원한 곳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돼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 지방은 차나무가 자라기에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 들어와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불교가 밀려나고 다도도 쇠퇴해 겨우 명맥만 이었다. 이는 선승들이 마시는 차 문화가 문인 사대부들이 즐기는 풍류의 약주로 대신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대흥사는 백두대간에서 산맥이 나뉘어 호남정맥의 끝자락인 해남 두륜산 남쪽 산수가 빼어난 곳에 자리 잡았다. 해남읍에서 대흥사 고산유적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남쪽으로 차를 달리면 십분도 채 안돼 고산 윤선도의 세거지인 녹우당(綠雨堂)이 나온다. 다시 곧바로 내려가면 새로 조성한 숙박 관광단지가 보이고, 여기까지만 해도 이즈음 어디에서나 흔히 보는 관광지 풍경이지만, 매표소를 지나면 풍경이 확연히 바뀐다. 숲길, 대낮인데도 울창한 나무들이 해가림을 하여 어두운 느낌마저 든다. 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절 길은 우람한 적송과 아름드리 벚나무, 고목의 참나무 느티나무, 군락을 이룬 동백 단풍나무 등이 장엄한 숲의 터널을 이룬다. 계곡 길을 새소리와 함께 오르니 번듯한 기와집 한 채가 나온다. 1930년대에 지어진 여관으로 한때는 해남 명창의 판소리를 들을 수 있는 멋진 곳이었으나, 지금은 유선관(遊仙館)이라 하여 나그네의 심사를 풀기에는 그만이다. 밤에는 계곡에서 부서져 내리는 물소리에 잠 못 이룬다. 대흥사 사찰의 영역은 이곳을 지나 피안교를 건너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깊이가 더해진다. 대흥사는 완전히 산자락을 감돌아 아늑하게 감싼 곳에 자리했다. 마치 태극이 아래로부터 오른쪽을 휘감아 위로 치솟듯 북쪽으로는 두륜산이 감싸고, 남쪽으로는 연봉들이 팔로 절을 감싸는 듯한 명당이다. 절 초입 고색창연한 부도전이 고찰의 면모를 묵묵히 보여준다. 정정한 소나무를 배경으로 역대 고승들의 부도가 적막하다. 철없는 뻐꾸기 멀리서 쓸쓸히 운다.대흥사는 원래 대둔사(大芚寺)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대흥사로 바뀌었고, 두륜산(頭輪山)의 한자어도 발음은 같지만 의미가 완전히 다른 두륜산(頭崙山)이었다. 순조 23년(1823) 초의선사와 수룡선사가 편집해 낸 ‘대둔사지(大芚寺誌)’에 따르면 대흥사는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잡고 있다. 그 후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사세가 크게 진작됐다. 그는 선(禪)과 교(敎), 나아가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하여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와 열세 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부도전을 지나 해탈문을 들어서면 가람이 두륜산을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절의 영역이 언뜻 보아서 구분이 가지 않는다.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어디가 어딘지 어리둥절하다. 절 전체가 한눈에 잡히지 않는 것은 건물을 전체 네 영역으로 나누어 배치한 독특한 건물 배치 구조 때문이다. 이는 산지 사찰의 특성으로, 물길과 산길 등 지형에 따라 전각을 배치하는 독특한 구성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에 비해 승주 선암사는 독립된 건물을 흩어지게 배치했어도 각 영역이 시각적 연속성을 갖는다. 좋은 대비다. 각 건물은 두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금당천을 경계로,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이 있는 남원으로 나뉘고, 다시 남원 뒤편으로 뚝 떨어져서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으로 구분한다. 대웅보전은 고종 광무 3년(1899)에 불 타 버린 후 다시 지은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다포집이다. 대웅보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상호(相好)는 우리가 언제나 보는 듯한 인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후덕한 인품이다. 불상을 조성한 불모가 이 지방 출신으로 당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의 전형을 두고 조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전라도 부처님의 부드러운 선과 인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 입구는 금당천 명당수를 건너 침계루(枕溪樓)를 통해 진입하는데, 침계루 아래층 각 기둥 사이에 모두 문을 달아 일반적 사찰의 누문이 아니라 서원 건축의 누문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남원은 돌담을 낀 계단에 북원과 연결되는데, 출입문인 가헌루에 들어서면 중심축과 약간 비껴서 천불전을 두고 있고, 동국선원이나 용화당 등 강원과 요사채가 각각 돌담으로 구획돼 있다. 천불전은 순조 11년(1811) 화재로 소실된 것을 완호스님이 재건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 다포 집으로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다. 천불전 내부에는 기둥과 보가 없이 계단식으로 설치된 단에 천 개의 옥돌로 만든 불상만이 꽉 차 있고, 그 끝이 천장의 공포와 만나 투시도적 효과를 연출한다. 남원 앞에는 초의선사가 만들었다는 무염지(無染池)가 아직도 무심히 있다.무염지 앞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연석으로 만든 수곽(水廓) 하나가 있는데 볼수록 재미있다. 사면이 둥근 바위를 통째로 파내어 만든 무심이 배어 있는 자연스러운 맛이 한국의 미요, 멋이다. 대흥사에는 일지암이 있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39세에 지은 조그만 암자다. 초의는 무안 출신으로 대흥사에서 13대 대종사를 역임한 대선사이며,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한국 다도를 중흥한 다성(茶聖)이다. 속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다. 초의는 불교의 선학(禪學)과 교학(敎學)을 나누지 않고 정진하며, 시문(詩文)과 유학(儒學)에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유자재한 구도의 길을 걸었다. 5세 때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인연으로, 15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후 운수행각(雲水行脚) 하다가 대둔사 10대 강사 완호 윤우(玩虎 尹佑) 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24세 때에는 강진에 와서 유배 생활을 하던 스물네 살 연상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스승으로 모시고 처음 교유했다. 다산은 이보다 먼저 만덕사(萬德寺)의 아암선사와 교유하며 차를 알았다. 다산은 초의에게서 차 공부를 하고,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주역과 시학을 배웠다. 어찌 보면 시와 그림을 서로 짓고 그려서 바꾸어 보던 문인들의 풍습인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따른 격이라고 할까. 참으로 멋있는 교유였다.초의는 늘 “모든 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平尙心是道)”라는 것을 기본자세로 삼았다. 선(禪)이나 교(敎)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이롭지 못하며 교와 선은 둘이 아니라고 보았던 초의와 오로지 선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던 백파(白坡,1767~1852)의 논쟁은 조선 후기 선 사상에 굵은 파장을 던졌다. 또한 초의는 불문(佛門)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으며 장 담그고 화초 기르는 것까지 허술히 대하지 않았다. 즉, 그에게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그뿐 아니라 초의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와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 한 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보았고,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며,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며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1815년 초의 나이 30세에 처음 만나 교유한 추사는 동갑내기로 승속(僧俗)과 유불(儒彿)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했다. 그들에게서는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초의는 귀양살이 하는 추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섯 차례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71세 되던 해, 42년간의 지음(知音)이었던 추사가 과천 우거에서 돌아가자, 그의 영전 앞에 ‘완당김공제문(阮堂金公祭文)’을 지어 올리고 일지암으로 돌아와 쓸쓸히 만년을 보내다가 세수 81세 법랍 65세에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했다. ‘명선(茗禪)’은 추사가 말년에 초의가 보낸 차를 받고 이의 보답으로 쓴 명품이다.일지암 오르는 길, 아침부터 산 안개가 자욱하고 연무가 서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녹음이 완연해 제법 여름기운마저 보인다. 그야말로 초록 물감에 온몸이 젖는다. 마음을 여니 초록물이 뚝뚝 떨어져 마른 산길을 적신다. 오르는 길 왜 그리 발걸음이 무거운지 한참을 헉헉댔다. 아침부터 산 아래 유선관에서 잘 익은 홍어회와 복분자술로 허기를 달랜 것이 취기를 부추긴 것도 있거니와, 그보다는, 속세의 잡사와 찌든 마음의 무거움 때문이리라. 산길 오르면서 산새들의 맑고 투명한 합창을 들으며 계곡물에 피어나는 풋풋한 산소 냄새와 부서지는 물보라 감상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올랐을까. 가파른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새 기운이 확 든다. 순간 발 아래 무변광대하게 펼쳐지는 산풍경이 오르던 숨 가쁨을 한순간에 날린다. 우와 저 산 좀 봐…. 멀리 발 아래 그림 같은 산봉우리 연맥이 달린다. 올봄, 사과 꽃 필 무렵 소백산 봉황산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해지는 저녁 그림자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이 탁 트이고 날아갈 듯 가벼웠다. 부드러운 두륜산 자락이 오월의 신록으로 솜사탕처럼 푸근하다. 정말이지 여기서 그냥 풍덩 뛰어내리면 산 아래 큰절까지 사뿐 날아갈 것만 같다. 잠시 마음을 산 아래 두다가 뒤돌아보니 절이 보인다. 아 여기가 일지암! 차 밭 찻잎이 오후 햇살에 빛난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