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설의 갑부 잉그바르 캄프라드

원 절약하면 1원 번 것이다. 이는 당신이 억만장자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말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절약하라는) 회사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주 자랑스럽다.”세계 최대 조립 가구 회사 이케아의 설립자 잉그바르 캄프라드(80).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3월 발표한 세계 갑부 순위를 보면 캄프라드의 재산은 280억달러.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 멕시코 통신 재벌 슬림 헬루에 이어 전 세계 4번째 갑부다. 포브스가 집계한 그의 재산은 2004년 180억달러(13위), 2005년 230억달러(6위)로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두쇠다. 주말에는 15년 된 구년묵이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비행기를 탈 때는 제일 싼 이코노미 석만 고집한다. 쇼핑할 때도 동네 슈퍼마켓에서 주말 할인 행사가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의 저택도 대중적이며 값싼 이케아 가구로 장식돼 있을 뿐이다. 그가 고향인 스웨덴을 떠나 스위스에 사는 것도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캄프라드는 이케아 직원들에게 항상 절약을 강조한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신 회사 직원들은 이면지 사용을 강요받는다던데…”라는 질문을 받자 “그게 어때서? 나도 이면지를 사용한다”고 응수했다. 모든 직원들이 절약을 실천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부터 솔선수범한다는 것.그는 이 같은 구두쇠 경영의 배경에 대해 “이케아 그룹은 계속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중국과 러시아 진출을 위해 우리가 버는 모든 것은 유보금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또 “80세를 맞는 것이 두렵지 않다”며 “죽을 시간이 없다”고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캄프라드의 ‘짠돌이 정신’은 이케아의 원가 절감 노력으로 이어진다. 이케아의 디자이너와 자재 구매 담당자들은 적절한 품질의 자재를 가장 싸게 공급할 수 있는 업체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빈다. 식탁 의자에 필요한 플라스틱 자재를 싼 값에 확보하기 위해 1년6개월을 애쓴 끝에 고속도로 방음벽에 쓰였던 폐품 플라스틱을 찾아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이케아가 세계 각국에 진출하면서 현지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로 원가 절감을 꼽았다.그렇다고 캄프라드가 ‘스크루지 영감’처럼 인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니세프(국제연합아동기금)의 최대 후원자 중 한 명이다. 이케아도 서유럽에서 사회 기여를 많이 하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캄프라드는 최근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스위스 로잔 예술학교에 50만프랑(3억7000만원)을 기부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덤에는 한푼도 가지고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소유주이지만 지금은 공식 직함이 없다. 1986년 이케아 그룹 회장에서 은퇴한 뒤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그의 세 아들이 이케아에서 일하고 있다.하지만 이케아 내에서 캄프라드의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하다. 이케아는 2005 회계연도(2004년 9월~2005년 8월) 회사 홍보 자료에서 캄프라드를 이케아의 컨셉트와 품질에 대한 감시자(watchdog)이자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캄프라드는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창조하는 인간 본성과 능력을 믿었다. 캄프라드는 1976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할 것이다. 모두 함께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이케아 직원들에게 익숙한 격언이 됐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나은 일상생활 창조’라는 이케아의 비전도 캄프라드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캄프라드는 실수를 인정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스스로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자기비판과 겸손, 자신의 단점을 고치는 능력은 이케아의 기업 문화를 만들었으며 캄프라드는 이 같은 문화의 화신(化身)이라고 회사 측은 치켜세웠다.캄프라드가 이케아를 세운 것은 17세 때인 1943년. 학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자 아버지가 약간의 ‘상금’을 줬고 그는 이 돈으로 이케아(IKEA)를 세웠다. 회사 이름은 자신의 이름(Ingvar Kamprad)과 자라난 농장(Elmtaryd), 지역(Agunnaryd)의 머리글자를 따서 지었다. 처음에는 그저 용돈 벌이나 할 생각이었다. 파는 물건도 볼펜이나 크리스마스 카드 따위의 잡동사니였다. 하지만 그는 고객들이 좋아하는 것을 파악하는 감각과 새로운 것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195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주택 100만호 건설 계획을 발표하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우연히 한 종업원이 테이블 다리를 잘라 차에 집어넣는 모습을 보고 소비자들이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조립식 가구를 생각해냈고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고가의 가구를 살 엄두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신개념 가구 매장을 선보인 것. 조립식 가구는 수송과 보관이 쉬울 뿐 아니라 판매 공간도 적게 차지해 여러모로 유리했고 캄프라드의 사업은 빠른 속도로 번창했다.캄프라드는 1958년 스웨덴에 첫 이케아 매장을 열었다. 이후 1963년 노르웨이에 첫번째 해외 매장을 오픈했고 1985년에는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캄프라드가 이케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케아는 글로벌 확장 전략을 꾸준히 추진해 1998년에 중국 시장, 2000년에 러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이케아는 2005 회계연도말 현재 전 세계 33개국에 220개 매장(프랜차이즈 포함), 9만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이케아는 2006 회계연도에도 19개 직영 매장을 더 오픈할 계획이다.2005 회계연도 매출액은 148억유로에 달했다. 이는 10년 전인 1995 회계연도 매출(40억유로)보다 270%나 늘어난 것이다. 연평균 27%의 성장세를 보인 셈이다. 매출의 81%가 유럽에서 발생했고 북미 시장은 16%, 호주를 포함한 아시아 시장은 3% 정도의 매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케아는 한국에선 아직 매장을 열지 않았다. 한국 소비자들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이케아 가구를 사고 있다.해마다 이케아 점포를 찾는 방문객은 전 세계적으로 4억5000만 명이 넘는다. 고객들에게 배포하는 상품 카탈로그는 연간 1억6000만 부나 된다. 유럽에서는 ‘이케아 카탈로그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회사 측도 이 카탈로그를 가장 중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여기고 25개 언어, 52개판으로 내보내고 있다. 또 이케아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는 네티즌도 연간 1억2500만 명이나 된다.그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요약된다. 싸게 많이 팔면 그만큼 가격을 낮출 수 있고 그로 인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믿고 대형 매장을 잇따라 연 게 주효했다. 물론 캄프라드와 이케아 직원들의 구두쇠식 원가절감 노력이 박리다매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단순히 가구를 파는 게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판다’는 마케팅 전략이 전 세계 소비자들이 이케아에 열광하는 이유로 꼽힌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지난해 이케아에 대한 분석 기사에서 “7000가지가 넘는 각종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이 전시된 이케아 매장을 돌면서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세련되고 값싼 제품을 일괄 구매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구두쇠라는 세간의 평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케아를 세계 최대의 조립 가구 회사로 키워냈지만 그에게도 자랑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10대 시절 네오(neo)나치 그룹에 들어가 활동한 전력이 그것.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1994년 직원들에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 당시 일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다.일각에선 캄프라드가 스웨덴의 높은 세금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것 아니냐며 눈총을 보내기도 한다. 스웨덴은 전 세계가 알아주는 복지국가로 부자들에 대한 세금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반면 스위스는 유럽 국가 중에서 세금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캄프라드는 근 30년간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이는 스웨덴 최대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이 자국에 남아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것과 대조적이란 점에서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