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 가는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살면서, 질곡과 억압된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생존을 위해 끝없이 저항하며 도전했고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물산장려를 위해 기업을 창업했던 지사 기업인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그의 묘비명에는‘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이며, 민족언론의 선각자이신 백산 선생이 여기 잠들어 계신다’고 적혀 있다. 오미일은‘한국근대자본가연구’에서 일제 강점기의 경제사를 크게 ‘민족자본론’과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나눴는데,‘토착자본’중 농업·상업자본이 1915년 후반부터 제조업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교육운동 비밀결사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안희제는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 인물이다.안희제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했으나 교주배척운동과 관련되는 바람에 양정의숙으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마친 후 교남학우회를 조직, 영남의 유지들과 교유하면서 고향 의령에 의신학교를 세우고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윤상은과 함께 구포에 구명학교를 설립했다.몇 해 전 경주 최 부자의 자취를 찾아 부산 동광동 백산상회 옛 자리에 세워진 백산기념관을 찾았을 때 안희제 선생의 손자인 안경하씨(安炅夏)를 만났다. 용두산공원에 있는 선생의 흉상과 꼭 닮은 안경하씨는 대구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으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으레 그렇듯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해양대학을 지망했고 선장으로 평생 외항선을 타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백산 안희제는 설득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가 대지주였다는 기록이 없었던 점으로 볼 때 자신이 돈을 모두 부담해 학교나 기업을 설립한 것이 아니라 경향 각지를 순회하면서 유지들을 설득해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누구든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이듬해 안희제는 북간도 연해주 등을 떠돌며 3년간 유랑생활을 하면서 안창호 이갑 이동휘 김동삼 신채호 등 독립투사와 교유한다. 안희제는 고향으로 돌아온 1914년(혹은 1915년) 소유답 2000두락(마지기)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처음에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취급하는 개인회사로 출범했다. 1917년 합자회사로, 1919년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로 바꾸고 경주 최 부자 최준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 회사에는 구포의 대지주 윤필은의 아들 윤현태, 진주의 대지주 강복순, 울산의 대지주 엄주원의 매부인 전석준 등 영남 지방의 대지주들이 몽땅 주주로 참여했다. 그의 웅변으로 민족자본이 하나로 뭉치게 된 것이다.경제사학자 조기준은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애당초 독립운동자금을 공급하는 자금원이 되기 위해 설립되고 운영됐다는 점에서 특색 있는 민족계 기업체였다고 말한다. 안희제가 최대 주주이면서도 사장이 되지 않은 것은 스스로 독립운동가와 실무 연락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백산무역은 각지에 연락사무소를 뒀는데 대구에 태궁상회를 경영하는 서상일, 서울에 미곡상 이수영, 봉천에 해천양행을 경영하는 이해천이 있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동언의 논문에 따르면 안희제는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과 독립신문 보급 등 국내 독립운동 기지로 백산상회를 설립, 운영했던 것을 주요한의 글을 인용해 밝히고 있다. 상하이로의 자금조달 방식은 항상 장부상 거래 형식을 취해왔으므로 일경의 수사망에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지만 해가 계속됨에 따라 일경이 눈치채게 되고 백산은 여러 번 구속돼 조사를 받았다. 백산무역은 그 뒤 주주대표가 중역을 고소하는 송사가 생겨 어려움을 맞은 끝에 1928년 1월 해산됐다.그동안 안희제는 조선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에 취임했으며(1918), 기미육영회를 조직했으며(1919), 동아일보 창립발기인(1920)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기미육영회는 유망한 청년을 선발, 해외 유학을 보내 미래의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영남의 유지들을 설득해 설립했다. 이 육영회에서 선발된 유학생은 김정설 이병호 이제만 전진한 문시환 등과 안호상 이극로 신성모 등이 있다.안희제는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1년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에 머무를 때 동향인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했다고 전해지며, 동아일보의 창립발기인 78명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또 이 신문의 부산지국장을 역임했다. 1926년 안희제는 이우식 등 유지들과 함께 당시 필화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한 ‘시대일보’를 인수해 ‘중외일보’로 개칭했다. 이 중외일보도 2년여 만에 63회의 행정처분을 받는 등 일제에 맞서 싸우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이 신문은 1931년 종간하고 노정일에게 넘겨져 ‘중앙일보’가 됐다. 언론투쟁으로 일경의 탄압과 감시를 받게 되자 안희제는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옛날에 유랑하면서 보아둔 만주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안희제는 1932년 광산왕 소남 김태원이 금정광산을 팔 때 이를 중개해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이때 수고비로 받은 7만원으로 발해농장을 샀다. 이 무렵 한국인의 만주 이민은 해마다 증가해 70만 명에 이르렀으나 농토가 없어 중국인 지주의 가혹한 착취에 방치된 상태였다.발해농장에서 이주 농민과 2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과 교육여건이었다. 안희제는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상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대종교에 입교했으나(1911) 두드러지게 활동하지는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새삼 방황하는 이주자들에게 정신적 지주로서 단군을 신봉하는 대종교에 심취해 3세 교주인 윤세복을 모셔오고 아예 동경성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옮겨오게 했다. 안희제는 대종교의 영계 참교 지교 등을 거쳐 1941년 상교(尙敎)로 승질(陞秩)됐으며 전적 간행을 담당해 ‘홍범규제’‘삼일신고’등 8종 3만여 부를 출판 배포했다. 일경은 이를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보고 그를 체포했다.안희제는 1942년 잠시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를 미행했던 형사가 의령에서 체포, 만주로 이송돼 목단강 경무청에서 9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족제 안영제가 경영하는 영제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순국했다. 이때가 광복 2년 전인 1943년 8월3일 나이 59세였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드라마는 토착자본이 식민자본주의에 시달리며 쓰러지는 처절한 모습과 흡사하다. 이헌창의 ‘한국경제통사’에 보면 민족자본이 식민지자본주의를 거쳐 광복 후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해체되면서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에 가장 성공한 지주는 지가증권을 고스란히 경방·삼양사·교육사업에 활용한 김연수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