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제 강점기는 우리 경제사에 있어 수난의 시대였다. 기업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로 전락했고 일본에 의해 강제로 토지가 수탈되는 비극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기업이 생겨나 뿌리를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화의 바람이 유입되면서 서구식 모습을 갖춘 근대화한 기업이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 경제사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삼양사 설립자인 수당 김연수(秀堂 金秊洙, 1896~1979)는 민족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수당은 일제 강점기로부터 60~70년대 산업 근대화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에 ‘산업보국(産業保國)’의 뜻을 갖고 한 길만을 달려온 기업인이다. 수당은 전북 고창의 명문가 아들로 태어나 교토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 일본 오사카 지역의 공업 단지를 둘러보며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는 광복 후 울산에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1921년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국내 경제는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돼 있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로 재편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으며 일본 기업인들은 우리 농민들의 농지를 수탈해 가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수당의 가문은 장성 부안 고창 영광 등 호남에 대규모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터라 그는 농지를 보존하고 농경 산업의 몰락을 막기 위해서는 근대적 영농 기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만주로 가 공업 단지와 농지 경영기법 등을 둘러본 뒤 1924년 삼수사(三水社, 삼양사 전신)와 장성농장을 세웠다. 비록 사업 초기 ‘갑자년 대흉’ ‘을축년 대홍수’를 겪어야 했지만 장성농장은 10년 후에는 1만석을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으로 변신한다. 장성농장의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의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만8000석 규모의 그의 농장은 근대 자본주의 성격을 갖춘 농업 기업으로 변신했다. 1931년 수당은 삼수사의 상호를 삼양사로 바꾸고 1934년에 이를 법인화했다. 농장 개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는 대규모 간척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계획됐지만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 방조제를 건설하는데 당시 건설 기술로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33년 수당은 함평에 대규모 간척 사업지를 조성해 연간 1만2000석의 쌀을 생산하는 기쁨을 누린다. 연이은 국내 사업의 성공은 수당으로 하여금 해외 사업에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설립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찰단의 일원으로 여러 차례 만주를 방문한 끝에 그는 그곳에 최초의 해외 진출 사례인 만주농장을 설립했다. 이후 1935년 수당은 형인 인촌 김성수에 이어 경성방직 사장에 취임한다. 경성방직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주주 공모 방식을 거쳐 2만 주의 발행 주식 전부를 조선인들이 가진 최초의 민족 기업이었다. 경방은 초대 사장을 개화파인 박영효가 맡고, 창립총회를 3·1독립선언식이 있었던 서울 태화관으로 정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고취된 기업이었다. 좌승희 서울대국제대학원 교수는 “경제 독립과 민족 자존이라는 가치를 창업 이념으로 내건 경방은 일제 시대는 민족의 자존심이었으며 60~70년대에는 섬유 전문 인력과 고용 창출 등을 통해 한국 근대 산업을 이끈 견인차였다”고 평가했다.그는 경성방직에서 태극성, 불로초 광목을 개발해 대련과 봉천 등 중국으로 판로를 넓혀나갔으며 1936년 중국 봉천에 삼양사 봉천사무소를 개설해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천일농장 반석농장 등 5개 협동농장을 개설해 본격적인 만주 시대를 열었고 이는 봉천에 설립된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인 ‘남만방적’으로 이어졌다. 수당은 인재 양성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장학재단 양영회를 설립했고 동아일보를 재정적으로 후원했으며 고려대학교와 고려중앙학원에 운영 기금을 출연해 교육 사업에도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15년 중앙학교(현 중앙중고등학교)를 인수한 김성수가 1929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한 것과 1932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인수하는데 수당은 최대의 후원자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는데 그는 연간 쌀 5000석을 생산하는 신태인농장을 보성전문학교에 기부했다. 이에 따라 재단법인 중앙학원의 설립은 학교의 발전 기반을 보다 확고히 다져 나갔다. 수당은 총 60여만원에 이르는 재단법인의 설립 재원을 위해 명고농장을 기꺼이 희사했다.인촌과 수당은 광복 이듬해에 보성전문학교를 중앙학원에 흡수해 설립 인가를 받아 오늘의 고려대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다졌다. 중앙학교는 후에 현 고려중앙학원으로 확대 발전됐다. 또 수당은 인촌을 도와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족 교육에도 신경을 쓴 수당은 만주 봉천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인 동광중학교를 설립했다. 소가둔(蘇家屯) 공장학교 설립도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그는 소가둔에 방적공장을 건설했으나, 교포들이 어린 딸들을 수백 리 먼 곳에 있는 공장으로 보내기를 싫어하자 공장 내에 학교를 세웠다. 초등부와 중등부를 둬, 공장 근무시간을 2시간 단축해 4시간 동안 수업을 했다. 직원들의 교육을 위해 근무 시간을 줄인다는 건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만방적 소가둔 공장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체 부설학교로서, 또한 생산 활동 못지않게 종업원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수당은 이 학교를 정식학교로 인가받아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뜻을 펴려고 했으나 광복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비록 수당은 1945년 광복으로 그동안 일궈왔던 만주의 사업장을 모두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지만 1956년 제당업, 수산업, 화섬산업 등 사업 다각화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 밖에 울산 일대에 대규모 공단을 조성토록 제안한 것도 수당의 생각이었다. 오늘날 이 일대가 한국을 대표하는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로 성장한 것을 놓고 볼 때 수당은 시대를 앞서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물론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재야 사학회에서는 그의 이러한 기업 활동이 일본 제국주의의 지원 내지는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면서 그를 친일 기업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 현실에서 기업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반론도 편다. 아무튼 수당은 농업이 중심이었던 시대 상황 속에서 미래를 예견하고 제조업을 키우는데 앞장선 기업인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