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세계 최고급 화이트 와인은 병에 걸린 포도로 만든다.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먹는 식품인데 좋은 포도로 만들어야지 어떻게 병든 포도로 와인을 만드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우황청심환을 예로 들어보면 간단하게 설명된다.건강한 소의 쓸개가 아닌 결석이 생긴 소의 쓸개로 만드는 것이 우황청심환이라는 것을 보면 재료가 나쁘다고 해서 제품마저 나쁜 것은 아니다. 관리를 잘못해 버릴 수밖에 없는 포도를 최고급 와인으로 바꾼 자연의 섭리는 너무도 위대하다. 일반적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선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해 잘 양조하고 숙성해야 한다. 포도 재배 농가 입장에선 가능한 한 늦게 수확해 고급 와인을 생산하고 싶어한다. 오래 두면 병에 걸리기 쉽고 수확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부분은 포도가 적당히 익었을 때 수확한다. 그러나 우연은 필연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들보다 늦게 수확한 한 사람 때문에 화이트 와인의 역사가 새롭게 바뀌었다. 남들은 포도가 잘 익었을 때 수확하고 발효해서 와인을 만들고 있는 데도 이 사람은 반대로 포도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다. 포도가 갑자기 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야 농업기술이 발달해 포도나무가 병들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당시에는 적당한 농약도 없었던 터라 이 사람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며칠 사이 이 병은 이 포도원의 나무 전체로 퍼졌고 농장 주인은 낙심한다. 무르고 터져서 못쓰게 된 포도를 보며 농장주인은‘이럴 줄 알았으면 1주일 만 더 빨리 수확할 걸’이라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한숨을 쉬면서 포도원을 둘러보던 중 그는 포도송이들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포도를 발견했고 남은 것이라도 포도주로 만들기 위해 포도를 수확했다. 포도들을 모아보니 겨우 작은 통 하나에 들어갈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포도주 공장에서는 가을에 포도를 발효한 뒤 겨울 내내 앙금을 분리해 술을 맑게 하면서 와인을 숙성한다. 드디어 봄이 왔다. 이웃의 모든 포도주 공장에서는 한 해 전 포도로 만든 와인을 병에 담는 동안 이 농장주도 작은 통에서 숙성한 소량의 와인을 꺼내 맛을 봤다. 와인을 잔에 조금 따르고 보니 색상이 일반 화이트 와인에 비해 탁했지만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일반 와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맛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고급 화이트 와인은 탄생했다. 농장주의 실수가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최고급 화이트 와인이 병든 포도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귀부병(Botrytis)이라고 불리는 병에 걸린 포도로 만들어야만 고급 화이트 와인이 탄생한다. 귀부병에 걸린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은 생산되는 지역이 한정적이고 수확량도 적어 희소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값도 최고 수준이다. 프랑스 보르도의 소테른 지방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이 대표적이며 독일의‘트로켄베에렌아우스레제’ 헝가리의‘토카이 에센시아’도 귀부병에 걸린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황제와 귀족들이 즐겨 마신 토카이 에센시아는 특히 정력에 좋아 귀족 부인들이 침대 밑에 두고 비상약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러시아 황실은 이 와인을 헝가리에서 모스크바로 운반하는데 러시아 황실 친위대인 코사크 기병대에 경호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토카이 에센시아는 지금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조되고 있어 약효 역시 변함이 없다. 단 이 와인은 단맛이 아주 강해 식후 디저트로 한두 잔만 마시는 것이 좋다. 아이스바인(Eiswein) 혹은 아이스 와인(Ice wine)도 세계 최고급 화이트 와인으로 꼽힌다. 독일에서는 아이스바인과 트로켄베에렌아우스레제를 놓고 어느 쪽이 최고급 와인인지가 논쟁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귀부병 와인과 마찬가지로 아이스바인은 인간의 나태함에서 비롯됐다. 대체로 늦게 수확할수록 포도는 잘 익어서 향과 맛이 좋아진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포도를 따 숙성해야만 좋은 와인이 탄생하는 게 정석인데, 아이스바인을 만든 농부는 늦가을까지 와인 수확을 늦췄다. 늦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포도는 구슬처럼 단단하게 얼게 됐다. 언 포도로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포도를 숙성해 와인을 생산했다. 와인을 만들 때는 압착해 과즙을 짜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아이스바인은 포도 알이 얼어 짜낼 수 있는 과즙도 일반 와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일반적으로 수확한 포도가 여러 개의 탱크를 채울 수 있는 과즙을 뽑아낼 수 있다면 아이스바인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자연의 이치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 언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고 맛을 보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기대도 하지 않은 이 와인의 향이 기가 막히게 좋고 맛도 달콤해 희한한 맛이 아닌가. 이 같은 농법이 알려지면서 독일을 비롯해 스위스 오스트리아 미국 캐나다 등 추운 지방에서 아이스바인이 생산되고 있다.아이스바인 역시 당도가 높아서 트로켄베에렌아우스레제처럼 식사 후에 마시는 디저트 와인으로 애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후 여건 상 아이스바인 혹은 아이스 와인을 생산할 수 없다. 만약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추운 지방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꼭 이 아이스바인을 맛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