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은사님과 통화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적자에 허덕이던 골드저축은행을 인수해 업계 1위로 우뚝 올라서 금융계를 깜짝 놀라게 한 임석 솔로몬상호저축은행 회장은 하필 MONEY와의 인터뷰 전날 25년 넘게 만나지 못 했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한다. 40대 중반인 그가 전화기를 붙잡고 펑펑 눈물을 쏟아낸 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할아버지 때만 해도 집안이 부유했는데 아버지 대에 오면서 각종 소송 등에 휘말려 가세가 기울어 지독하게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가정 여건 탓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주간 야간을 합해 제가 1등을 했습니다. 당시 교감 승진을 앞두고 있던 은사님은 저에게 ‘학비를 대줄 테니 서울로 올라가서 학원 강의를 들어라’고 하셨어요. 좋은 여건에서 공부해 명문 대학에 진학하라는 뜻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학원 과외가 전면 금지됐다는 것이었어요. 재학생이 학원을 가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던 것이죠. 이 짐을 은사님이 짊어지셨습니다. 서울에서 고독과 싸워가며 힘들게 공부하고 있었는데 예비고사 두 달 전 갑자기 학교로 내려오라는 전보가 왔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내려가 보니 학교에 난리가 났었죠. 일부 학생들이 교육청에 제보했던 거예요.”이후 문책이 이어졌고 그의 스승은 끝내 교감에 오르지 못한 채 평교사로 퇴직했다. 임 회장은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앞만 보고 내달리는 와중에도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스승의 은혜에 언젠가 보답하리라 생각했다.“최근 전북 익산의 나라저축은행을 인수하고 회사 임원과 얘기를 하던 중 은사님의 추억을 얘기했더니 이 임원이 수소문해서 은사님을 찾았어요. 직접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에 날짜를 보고 있던 사이 은사님이 먼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연락 좀 하지…’라며 힘없이 떨리는 은사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없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죄송합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죠. 은사님의 뜻을 기려 장학 사업을 할까 합니다.”최근 금융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임 회장은 어린 시절 이처럼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좌절하거나 남 탓을 할 여유가 없었다. 대신 그의 머리와 가슴엔 원대한 비전과 열정이 채워져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옥외 광고 사업 시작해 큰돈을 벌었다. 현금으로 100억원이 넘는 돈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성공이 가능했을까.옥외광고업은 건물 옥상이나 도로변 등에 광고판을 설치하고 광고주를 유치해 수익을 내는 사업 모델이다. 따라서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건물주나 도로 관리 책임이 있는 관청 등과 협상을 잘 해야 한다. 또 광고주를 유치하기 위한 영업력도 관건이다. 결국 제조 설비가 필요 없는 이 비즈니스 성공의 핵심 요인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임 회장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직원들의 역량을 100% 이상 발휘시키는 지혜도 갖고 있었다.“옥외광고업을 하면서 매주 월요일 아침 7시에 회의를 했습니다. 집이 먼 직원들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저도 차 안에서 잠을 자다 회의에 참석하기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직원들의 불평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솔선수범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것의 70~80%만 해달라고 직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용도폐기되면 언제든지 쫓아내라고 말했습니다. 나태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생명이 끝난다고 봅니다. 이런 호소가 먹혔는지 직원들이 정말 열심히 해 줬습니다. 지금도 같이 일했던 직원들은 저를 만나면 ‘당시 워낙 혹독하게 일했기 때문에 어디에 가도 두렵지 않다’고 말할 정도입니다.”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사업 성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절감했다. ‘비즈니스는 곧 사람과의 싸움’이란 그의 신념은 아직도 확고하다. 그래서 그는 업계에서 유례없이 많은 비용을 투자해 인력을 교육하고 고급 인재를 영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재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 저는 인재를 제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옥외광고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원대한 비전은 끝이 없다. 새로운 성장 사업을 찾던 그는 금융에 눈을 돌린다. 2년여 준비 끝에 1999년 4개 시중은행과 공동 출자, 솔로몬신용정보를 설립하며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신용정보 회사는 금융권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지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부실화한 골드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그의 도전은 이어졌다. 하지만 골드저축은행을 정상화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았다. 인수 전 2년 동안 대표이사가 10번이나 바뀔 정도로 노사간 신뢰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인사위원회가 노사 동수로 구성될 만큼 노조도 강성이었다.“생각보다 골드저축은행의 부실이 커 후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낭떠러지에 선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직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 설득했습니다. 1년 간 마신 폭탄주가 1000잔이 넘습니다.”이런 줄기찬 설득으로 주인의식을 불어넣은 그는 인센티브 제도를 정비하고 적절한 보수체계를 갖추면서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다. 어느 정도 기업 문화의 기반이 잡혀나가면서 그는 저축은행을 부활시킬 방법을 찾아 나섰다.은행과 거래하기 어려운 신용등급을 지닌 서민이나 중소기업이 주로 저축은행을 이용한다. 사채시장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찾는 제도권 금융사로 인식됐다. 외환위기 이후 서민 경제가 무너지면서 부실 대출이 급증하는 등 누가 보더라도 저축은행은 사양산업이었다. 하지만 임 회장은 사양산업의 굴레를 숙명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찾아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최근 급성장한 미국의 한 커머스뱅크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금리를 더 많이 줘서 거래하는 고객은 3%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이자율이 다소 낮더라도 한 차원 높은 서비스를 제공, 고객이 만족감을 갖고 거래하는 비율이 63%나 됐습니다. 예금 금리를 조금 더 많이 준다고 해서 거래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습니다.”저축은행은 은행보다 높은 예금 금리를 제시해 고객을 모아 왔다. 물론 이런 장점이 고객 유인 효과가 있었지만 이 장점 하나만으로는 사양산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임 회장은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고품격 서비스를 통해 ‘신뢰’라는 가치를 줘야겠다고 판단했다.“회사의 얼굴은 창구 직원들입니다. 아무리 회사가 훌륭한 상품을 만들어도 창구 직원들이 환한 미소를 짓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대기업 강사를 불러와 친절 교육을 실시하고 고객 감동 서비스를 모니터링하는 회사에 의뢰해 매월 직원들의 친절도를 체크합니다. 언제라도 직원들의 친절도를 1등부터 300등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예금 금리가 다른 저축은행에 비해 다소 낮지만 솔로몬에 돈을 맡기는 고객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여기에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나 부실채권(NPL) 매입, 부동산 담보대출 등 다양한 수익원을 개발하며 소액 대출 위주의 수익구조를 다변화해 나갔다. 프라이빗 뱅킹 같은 고품격 맞춤형 서비스도 모색했다.이런 노력 끝에 솔로몬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작년 6월 부산에 연고를 둔 한마음저축은행을 인수하며 업계 1위 등극의 신호탄을 쏜 후 전북 익산의 나라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자산 규모가 3조5000억원으로 커졌다. 지방은행인 제주은행(1조9819억원)보다 훨씬 큰 규모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실도 튼튼히 다져갔다. 적자를 면치 못하던 부산 솔로몬저축은행이 지난해 말부터 흑자로 돌아섰고 올해 600억원(계열사 연결 시 800억원)의 순이익을 낼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큰 꿈을 갖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축은행의 성장을 가로막는 각종 규제와 제도 등으로 인해 어려움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형화와 겸업화는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입니다. 우리의 경쟁력을 높이고 주주와 고객들에게도 소중한 가치를 줄 수 있다면 보험이나 증권 업종 진출 등도 차츰 고려할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