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문화가 살아 숨쉬는 인사동 거리. 경인미술관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왼편으로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나타난다. ‘민가다헌(閔家茶軒)’이라는 간판과 대문 옆에 서 있는 ‘서울시 민속자료 제15호 민익두의 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시선을 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을 지나 본채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서려는 찰나, ‘신발을 신고 들어오세요’라는 간판이 신발 끈을 다시 묶게 한다. ‘민가다헌’은 동서양의 매력을 접목한 퓨전 한식당이다.한국 최초의 입식 한옥인 민가다헌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전통 방식을 벗어던진 것처럼 운영방식도 독특하다. 국내 최대 와인 유통기업인 와인나라가 2002년부터 운영 중인 이곳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퓨전 한식과 와인, 전통차를 함께 즐기도록 꾸며졌다. 전통 창호와 문양, 화조도가 곱게 수놓아진 병풍, 전통 발, 그리고 고풍스러운 자개장은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간 느낌이다. 실내에 걸린 옛날 사진과 골동품들도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1930년대 개화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익두의 집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서양식 ‘클럽’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첫 신식 한옥이다. 설계는 화신백화점을 만든 건축가 박길용씨가 담당했다. 담장과 본채는 전통 가옥 양식을 따르되 화장실과 욕실은 집 안에, 각방을 연결하는 대청 대신 긴 복도를 만든 게 특징이다. 마치 전통과 근대가 섞인 개화기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다.“서울시 문화재이기 때문에 인테리어를 함부로 바꾸지 못하고 원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집이 건축됐을 때 서구 문화를 도입했던 것처럼 메뉴도 우리 전통 음식에 아메리칸 스타일을 혼합한 것으로 구성했지요. 그래서인지 인사동을 찾는 외국인들이 특히 좋아하세요. 박물관에서 식사하는 기분이라고 합니다.”민가다헌 신용철 매니저의 설명이다. 신 매니저는 조선호텔에서 24년 동안 지배인으로 활동한 서비스 업계의 베테랑이다. 이 식당에서 판매하는 150여 가지 와인을 관리하고 크고 작은 와인 행사를 주관하는 것도 신 매니저의 몫이다. 와인에 주력하는 레스토랑이다 보니 상주하는 소믈리에도 있다. 프랑스에서 전문 과정을 마친 소믈리에 조윤주씨(32)의 도움을 받으면 주문한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골라 마실 수 있다. 와인이 미각을 돋우는 레스토랑답게 음식도 깔끔하다. “민가다헌의 인기 메뉴는 너비아니 스테이크와 소꼬리찜입니다. 모두 한식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아직은 한식 퓨전 요리라고 하기에 조심스럽죠. 주로 한식 재료에 소스나 조리 방법 등을 서구식으로 재현하는 편이에요. 너비아니 스테이크는 꽃등심을 갈비 양념에 쟁여 굽고 육즙 소스를 뿌려 내놓죠. 메로구이를 할 땐 미소(일본 된장)로 쟁이고 캘리포니아식 소스를 사용해 퓨전을 만듭니다.”송경섭 총주방장(36)은 리츠칼튼에서 양식의 기틀을 닦고 청담동 시안레스토랑에서 퓨전 요리를 시도한 11년 경력의 ‘퓨전 전문가’다. 프랑스와 호주에서 유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민가다헌 특유의 퓨전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이 식당의 요리는 간단하게 점심코스와 저녁코스, 일품요리로 나뉜다. 단품 메인요리 가격으로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점심 세트 메뉴는 실속파에게 제격이다. 전복죽과 샐러드, 날치알과 허브를 넣은 허브비빔밥 세트, 현미 리조토를 곁들인 소꼬리찜 세트, 야채볶음을 곁들인 너비아니 세트가 추천 종목이다. 저녁에는 인삼 밤 대추를 넣은 닭고기구이와 코냑을 넣어 구운 포크찹이 메인으로 나오는 세트메뉴 A와 인삼 흑미 소스를 곁들인 오골계, 다진 쇠고기를 채운 대추튀김, 왕새우구이와 블랙빈 소스가 메인인 세트메뉴 B가 있다. 일품요리로는 녹두죽과 더덕을 넣은 돼지갈비살찜, 백김치쌈 등이 있다. 여기에 와인을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터.이곳을 자주 찾는 손님 명단에는 문화계 인사, 각국 외교사절, 정·재계 인사 등이 두루 망라돼 있다고 한다. 민가다헌은 잠시 속도경쟁에서 벗어나 느림의 여유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