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전 국내의 한 뮤지컬 전문잡지가 관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이 결과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품 1위에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 꼽혔다. 1970년대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미스 사이공’과 장발장 이야기 ‘레 미제라블’ 등이 뒤를 이었다.이런 결과는 국제적인 지명도와 대체로 비례한다. 세계 뮤지컬 시장에서 흔히 ‘빅4’로 대접받은 작품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캐츠’ ‘레 미제라블’이 이 그룹에 속한다.각자 개성을 뽐내는 예술작품을 상대로 순위를 매기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이런 무모한 시도가 버젓이 행해진 것은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꾼’들의 장난이라는 의혹이 짙다. 이들의 선전술에 매스 미디어가 동조하면서 마치 정설처럼 굳어진 것이다.하지만 꾼들의 술수일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수긍은 간다. 1980년대 이후 뮤지컬이 거대 자본이 투입된 물량 위주의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제작비 규모와 동원력이 질을 좌우하게 됐다. ‘빅4’는 그런 경쟁에서 당당히 살아남는 작품. 모두 세계 상업 공연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런던 웨스트 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보통 십수년 이상 롱런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냈다. 참고로 1986년 웨스트 엔드에서 초연, 2년 뒤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오페라의 유령’은 세계에서 1억명 이상이 관람했으며, 30억달러 이상을 벌었다.20세기 뮤지컬의 신화 ‘오페라의 유령’이 한국을 찾았다. 6월10일부터 석 달 이상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될 예정인데, 티켓 판매 첫날 1만3000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등 부동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공연단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투어팀. 하지만 출연자와 스태프 모두 영국의 원제작사 RUG(The Really Useful Group)의 엄정한 관리 아래 선발된 사람들이며, 매뉴얼에 입각한 철저한 품질관리가 이뤄졌다는 면에서 오리지널에 비해 손색이 없다.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이런 블록버스터형 공연물 제작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원제작자 혹은 권리를 가진 어느 누가 주축이 돼 투어팀을 만들면 이것을 사와서 공연하는 것이다. 이번 ‘오페라 유령’은 제작과정에 한국 자본이 들어간 공동제작 형태라는 점에서 단순한 수입공연과는 구별된다. 다른 하나는 공연 및 제작권을 특정 국가의 흥행사에 맡겨 그곳 언어와 배우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2001~2002년 LG아트센터 공연은 후자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를 일명 ‘라이선스(License) 방식’이라고 한다.한국에서 ‘오페라의 유령’은 이 두 가지 방식이 다 동원됐다.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대박의 맛을 본 뒤 공동제작 형태의 투어팀 내한으로 이어졌다. 주최측(예술의 전당,CJ엔터테인먼트,설앤컴퍼니)은 이 작품에 대한 우리 관객들의 인기와 호응도가 높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판매가 호조여서 이번에도 예감은 좋다. 지난번 120억원을 투입한 라이선스 공연은 19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뮤지컬 산업화를 선도했다. 7개월 장기 공연도 국내에서 전무한 시도였지만 제작비 매출 순이익 등 공연사의 기록 여럿을 새롭게 정립했다.이제 작품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영국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이다. 웨버는 이 작품 외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캐츠’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등 20세기 말 불멸의 대작을 만들어 ‘뮤지컬 황제’로 불리는 인물이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줄리앙 로이드 웨버가 그의 동생. 런던음악대학 지휘자였던 아버지 윌리엄 사우스콤 로이드 웨버와 함께 음악 명가를 이룬다. ‘오페라의 유령’은 작품 구상 2년 뒤인 1986년 런던 ‘허 매지스티스 극장(Her Majesty's Theatre)’에서 초연됐다. 지금도 이곳에서 19년째 롱런하고 있다.이 작품이 선보일 당시 웨버는 손만 대면 모든 게 황금으로 변하는, 이미 세계 뮤지컬계의 ‘미다스의 손’ 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후에 나온 작품이 대부분 그만 못했다는 점에서 ‘오페라의 유령’이야말로 절정기의 산물로 꼽힌다. 그의 다른 메가 히트작인 ‘캐츠’는 ‘오페라의 유령’보다 5년 앞서 시장에 나왔다. 지금도 뮤지컬 흥행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이다. 1970년대 초 등장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성공 뮤지컬의 시발점으로 본다면 적어도 웨버는 지금까지 30여년을 ‘지지 않은 태양’으로 군림하는 셈이다. 한때 그의 활약에 두려움을 느낀 전통의 브로드웨이는 ‘영국의 공습(British Invasion)’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2막으로 이뤄진 ‘오페라의 유령’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괴담을 소재로 했다. 무대는 1911년 프랑스 파리 오페라 하우스. 이 고색창연한 무대를 배경으로 여가수 크리스틴과 그녀를 사랑하는 유령(팬텀), 그의 연적 라울 세 사람이 엮는 러브 스릴러다. 크리스틴과 라울의 사랑이 익어갈수록 팬텀의 질투와 복수심은 오페라 하우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30만 개의 유리구슬로 장식된 0.25t의 샹들리에 낙하 장면(1막 끝)도 유령이 조화를 부린 것. 비록 ‘오페라의 유령’을 보지 못한 사람도 상식처럼 알고 있는 명장면으로 꼽힌다.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뮤지컬 넘버(노래) 가운데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은 지하 유령의 미궁에서 팬텀과 크리스틴이 부르는 이중창 ‘The Phantom of the Opera’(1막4장)와 호수 저 편에서 팬텀이 홀로 부르는 ‘The Music of the Night’(1막5장), 그리고 2막 극중 극 형식으로 삽입된 오페라 ‘돈 주앙’에서 팬텀과 크리스틴이 부르는 ‘The Point of No Return’이 꼽힌다. 특히 팬텀이 남의 눈을 피해 신분을 숨긴 채 크리스틴과 재회해 부르는 2막의 노래는 제목처럼 ‘돌아설 수 없는’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절절히 전하는 백미다.역사가 깊으면 사연도 많은 법이다. 이 뮤지컬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는 역시 초연 무대의 주인공이다. 요즘은 팝페라 가수로 활동하는 크리스틴 역의 사라 브라이트먼과 아직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팬텀 역의 마이클 크로퍼드다. 미려한 음색을 자랑하는 브라이트먼은 공연 당시 웨버의 부인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그녀를 위한 웨버의 ‘헌정공연’이라는 소문도 따랐다. 2001년 한국 공연에서도 많은 스타들을 배출했다. 이혜경과 김소현 윤영석 유정한 등이 당시 살인적인 오디션을 통과한 주인공들이다. 이번 공연엔 브로드웨이 활동 경력이 있는 브래드 리틀과 마니 랍이 각각 남녀 주연으로 등장한다.‘오페라의 유령’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이 원작이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추리소설에 능했던 르루는 십분 그런 재능을 살려 1911년 이 소설을 탈고했다. 하지만 10년 뒤 유니버설 영화사가 이 소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장됐을 게 뻔하다. 영화사는 걸출한 재능을 지닌 론 채니를 기용, 불후의 팬텀을 그려냈다(웨버는 지난해 조엘 슈마허 감독의 영화 버전을 선보였다).웨버는 이 무성영화의 카피본을 보는 것으로 뮤지컬 작업을 시작했다.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일꾼들이 속속 가세했다. 뮤지컬 연출의 최고봉 헤럴드 프린스를 비롯해 찰스 하트와 리처드 스틸고(이상 작사), 질리언 린(안무) 등이 신화의 주역들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거함을 지휘한 선장(프로듀서)은 공연계의 큰손 카메론 매킨토시였다. 제작사는 웨버가 이끄는 RUG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