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오월 초, 낮게 구름 드리운 초여름, 안동 풍산 너른 들판을 돌아 강 언덕에 오르니 한눈에 보이는 낙동강 풍경이 시원하다. 확 펼쳐진 강변, 굽이치는 물줄기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분다. 흰 모래톱 병산 더욱 푸르고 초록 강물 사이 날아가는 백로 더욱 희다. 사과밭 농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아직 산모퉁이를 돌지 않아 그곳의 흔적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벌써 병산서원에 가 있다. 서원 입구 노송의 정다움에 마음을 빼앗기자마자 병산서원은 수줍은 듯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병산서원(屛山書院)은 화산을 주산으로 강 건너 병산을 파노라마처럼 마주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오월의 햇살이 병산 앞 백사장에 눈이 부실 듯 내린다. 녹음이 싱그러워 초록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병산을 바라보노라면 시·바람·아련함·세월 이런 것들이 읽힌다. 강물은 유유히 역사 속으로 흐르고 사람도 사랑도 흘러 함께 그 역사 속에 파묻힌다. 무심의 경지, 말없이 빛나는 침묵을 본다. 강변 넓은 모래사장 옆 언덕에는 노송들이 꿈틀거리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병산 그림자를 짙게 띄우고 있다. 병산에서 하회까지 걸어서는 십리. 늘 한번 걸어 보고 싶었던 길이다. 이번에도 미처 가지 못한 그 길을 다음 번 좋은 계절을 만나면 정말 작정하고 하회까지 걸어봐야지. 그 옛날 하회 유생들 걸어서 서원까지 오던 그 길을…….병산서원은 원래 고려 중기부터 있던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모체로 하여 건립되었다. 1572년(선조 5년)에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서당을 현재 위치로 옮기고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3년(광해군 5년)에 서애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 등 지방유림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다. 그 후 1863년(철종 14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류성룡은 1542년, 중종 37년에 풍천면 하회동에서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향시에 급제하였고 스물두 살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후 이조정랑, 사간, 정언, 대사간, 대사헌, 대사성,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하며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데 크게 공헌하여 구국의 재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자그마치 일곱 계단을 끌어올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문신 출신인 권율을 도원수로 기용하여 임진왜란을 역전시킬 수 있었던 안목과 과단성은 지금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서애는 1598년(선조 31년)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임진왜란의 기록을 집대성하여 후세에 귀감으로 삼을『징비록(懲毖錄)』을 집필했다.『징비록』은 <1586년, 일본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가 자기 나라 임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왔다.>로 시작하여,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도 앞바다에서 적을 크게 물리쳤다. ……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파주로 들어갔다. “너희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돌아가지 않으므로 명나라에서 다시 대군을 일으켜 서해를 건너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충청도 길이 끊겨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내가 평양에서부터 그대와 친분이 있어 알려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길로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급했던 국난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 서애의 수기(手記)이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있는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기사이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가장 객관성 있게 적고 있어서 전란의 쓰라린 교훈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황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귀중한 역사서다. 책 이름 『징비록』은 시경의 「소비(小毖)」편에 “미리 지난 일을 징계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간다”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서애는 하회마을 앞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구상하고 썼다. 옥연정사는 집 앞에 있는 소(沼)가 옥과 같이 맑고 푸르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류성룡의 호 ‘서애’는 옥연정사가 있는 부용대 절벽에서 취하여 지은 것이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솟을대문이다. ‘복례’는 논어의 「안연」편에 나오는 “克己復禮爲仁(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곧 세속적인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극복하고 예를 갖추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극기복례위인을 마음속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복례문을 들어서니, 만대루가 가파른 계단 위에 성벽처럼 옆으로 길게 버티고 서 있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만대루는 단순한 부재와 절제의 공간, 상큼한 비례가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인공과 자연이 하나가 된 공간이다. 덤벙주초에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참으로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선비의 꼿꼿하고 청청한 정신이 동시에 아래 위층 건물에 살아나 있다. 만대루(晩對樓)의 ‘만대’는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翠屛宜晩對(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에서 따온 것이다. 누각의 이름을 시에서 빌려 왔듯이 만대루가 얽어내는 공간은 가히 시적이다. 보름 병산 위로 떠오르는 둥근달이 만대루 앞 방형 연지에 비치고 달빛 가득 서원 안마당에 내릴 때를 상상해 보라.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이다. 만대루는 실로 병산서원의 백미요, 비어 있음의 철학과 미학의 본보기이다.만대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강은 그렇게 흐르고 있다. 푸른 병풍 둘러친 산 아래 푸른 강물이 흐르고 백사장 흰모래는 태초의 고독을 간직한 듯 고요하다. 시심이 난다. 동진의 문인 왕유(王維)는 “田園樂(전원의 즐거움)”에서,이라 하여 전원의 즐거움을 꿈같이 그려 내었지. 나도 그런 꿈 그려보며 시심 달래다가 초여름 햇살에 그림자 진 산 이편과 물 저편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한 폭의 산수화 무심히 바라본다. 물새는 우는 소리 들리지 않지만 여울물 굽이치는 소리는 들릴 듯하여 마음을 가다듬는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智者樂水)라.’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더니 예서 공부했던 선비들은 모두 인지자(仁智者)라. 시절이 이쯤 와 있어도 풍광이 아름다운데, 그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절집 경치가 너무 아름다우면 고승이 안 나고, 서원 경치가 너무 좋으면 공부가 안 된다는데 이곳 유생들은 공부가 잘 되었을까? 아니면 산천경개의 빼어남에 취해 학문의 열정을 날려 보냈을까…. 괜히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열두 시 정각, 군내버스는 덜컹덜컹 마른 먼지를 뿌리며 빈 차로 떠나고, 서원 앞뜰에는 오후 햇살이 나른하게 내린다. 물새는 푸른 병산 아래 날고 버스는 떠나고 그렇게 세월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