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두 농부가 논에서 열심히 벼를 베고 있다. 한 사람은 허리를 펴는 법이 없이 계속 벼를 벴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중간중간 논두렁에 앉아 쉬었다.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저녁이 되어 두 사람이 수확한 벼의 양을 비교해 보니, 틈틈이 논두렁에 앉아 쉬었던 농부의 수확량이 훨씬 더 많았다. 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한 농부가 놀라 물었다. “난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는데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틈틈이 쉰 농부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난 쉬면서 낫을 갈았거든.”하루 종일 쉬지 않고 무딘 낫을 휘둘러댔던 근면 성실한 농부는 약이 오르고, 화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근면 성실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잘 놀아야 성공한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생뚱맞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노는 이야기’를….”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혀 끝까지 와서 맴도는 대답이 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어려운 겁니다.”허리도 펴지 않고 하루 종일 무딘 낫을 휘둘러대는 농부처럼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경제도 그저 근면 성실하기만 하면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것처럼 생각한다. 20세기까지는 그랬다. 산업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을 통해 부가가치가 생산되는 그때는 근면 성실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성실하기만 한 사람은 21세기에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세상에 갑갑한 사람이 근면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다. 물론 21세기에도 근면 성실은 필수불가결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21세기는 지식기반 사회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더 이상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 인간의 창의적 지식이 부가가치의 원천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미와 창의력은 심리학적으로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들이 국가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을 한번 잘 살펴보라.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되나. 모두들 죽지 못해 산다는 표정이다.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21세기의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의 사는 표정은 더 심각하다.경제 정치문제 때문에 한국사회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사람,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다. 정치 경제는 2차적인 문제다. 행복한 사람,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의 정치 경제는 잘 돌아가게 돼 있다.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노는 이야기냐고 혀를 차는 이들이 유포하는 불안감은 사스나 조류독감 보다도 더 빠르게 전염된다. 이들은 21세기 국가경쟁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저 불안할 뿐이다. 이들의 여가문화에 대한 이해 또한 무지하기 짝이 없다. 이들에게 노는 것이란 그저 폭탄주, 노래방뿐이다. 그러니 경제가 어려울 때 폭탄주에 젖어 살고, 또 먹은 술을 개내기나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이들의 생각대로 폭탄주와 노래방이 노는 것의 전부라면 경제가 어려울 때 절대 놀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경제가 아무리 좋아져도 절대 놀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천박한 놀이문화라면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재미있게 놀려고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우리는 못마땅한 이들에게 또 이렇게 욕한다.“놀고 있네.”잘못된 사회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이런 사회에서는 잘 먹고, 잘 살고, 잘 노는 사람은 없게 돼 있다. 행복하고 재미있으면 욕먹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웃는 표정, 행복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TV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정치가, 한국의 대표적 최고경영자(CEO)의 표정에서 도대체 웃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어려울수록 잘 놀아야 한다. 어려울수록 사는 게 행복하고 재미있어야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