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al AIDA
같은 소재의 작품이 장르를 넘나들며 인기를 구가하는 예는 비일비재하다. 영문학 불멸의 거인 윌리엄 셰익이스피어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 다양한 장르로 탈바꿈해 공연되는 대표적인 경우다. 비극적 사랑 이야기의 대명사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자. 레너드 파이팅과 올리비아 핫세 주연의 영화도 유명하지만, 원래 이 작품은 연극의 영원한 고전이다. 연극도 수많은 연출가에 의해 늘 새롭게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뮤지컬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20세기 미국의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환생했다. 캐플릿과 몬태규 두 가문의 이야기를 뉴욕 뒷골목 젊은 갱단의 이야기로 현대화한 이 드라마는 미국 뮤지컬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수만 가지로 자기 분열하는 가공할 만한 생산성을 갖춘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위대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무시간성(timeles)이라는 수식어를 보탠다.경계 넘나들기의 좋은 소재로 오페라도 한 몫을 한다.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자. 이 오페라는 옛 북아프리카 누비아(현 에티오피아)의 공주 아이다와 이집트 파라오의 딸 암네리스, 그리고 두 여인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의 전설과도 같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이면에는 두 나라 사이의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깔려 있지만, 그것은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를 절절하게 만드는 실루엣과 같다. 베르디가 1871년 수에즈 운하 개통을 기념해 작곡,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20세기 신종 예술의 총아 뮤지컬이 외면할 리 없다. 비교적 단순한 플롯, 그리고 전설 같은 사랑 이야기는 뮤지컬로 만들기에 그야말로 ‘딱’이다. 이를 실행에 옮긴 곳이 미국 대중예술을 리드하고 있는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월트 디즈니다.애니메이션 등 영화에 주력해온 디즈니는 1990년대 ‘애니메이션의 뮤지컬화’를 시도하며 ‘미녀와 야수’로 뮤지컬 시장에 진입했다. 10년 전의 일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뮤지컬은 토착적인 전문 업체들의 몫이었으나, 디즈니가 이 사업에 진출하면서 미국에서 기업형 뮤지컬 제작 시대가 열리게 됐다. 첫 작품 미녀와 야수가 대박을 터뜨리며 디즈니 뮤지컬 제작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에 나온 ‘라이언 킹’은 여러 면에서 ‘미녀와 야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으며 작품성과 상품성을 입증했다.2000년 3월 뉴욕 브로드웨이의 팰리스 극장에서 초연한 뮤지컬 아이다는 디즈니 뮤지컬 작업의 세 번째 주자다. 제작비는 당시 브로드웨이 최고 수준인 1500만달러. 이전 두 작품의 콘텐츠가 애니메이션이었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의 원천은 앞서 말한 대로 오페라다. 흥행 성적은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에 크게 미치지 못했지만(현재 브로드웨이 공연은 종료됐다), 뮤지컬 양식의 경계를 넓히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록 뮤지컬로 오페라와 음악 스타일이 전혀 다르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이 실용적이며 현대적이어서 뮤지컬의 새 차원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이 뮤지컬이 한국에 상륙한다. 중견 뮤지컬 전문 업체인 신시뮤지컬컴퍼니가 디즈니로부터 작품을 사와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다. 한국 배우가 나와 우리말로 연기하는 ‘한국화 버전’이다. 무대 세트와 의상 등 공연에 필요한 모든 기술의 이식 과정은 디즈니 팀에 의해 철저히 관리된다. 이전에 선보인 오페라의 유령과 미녀와 야수의 공연 컨셉트와 같다. 제작비가 120억원에 이르며 공연기간은 8개월이다. 국내 공연사상 최장기, 최대 제작비 뮤지컬로 꼽힌다.까다로운 오디션을 통해 옛 인기 여성 보컬그룹 핑클의 멤버였던 옥주현이 주역인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 외에 문혜영, 이석준, 이건명, 배해선, 허준호 등이 출연한다. 이 뮤지컬의 작곡가는 영국이 자랑하는 국보급 가수 엘튼 존이다. 그는 아프리카 리듬을 멋들어지게 용해시켜 만든 첫 작품 라이언 킹 하나로 일약 뮤지컬 대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아이다는 음악적 다양성이 더욱 풍부해진 그의 역작이다.2막의 뮤지컬 아이다는 모두 22개의 뮤지컬 넘버(노래)로 이뤄졌다. 음악은 팝적이며, 록 같기도 하고 리듬앤블루스 느낌도 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저 ‘록 뮤지컬’로 표현하기에는 음악적인 다이내미즘이 너무나 풍부하다. 오페라의 유령에서처럼 심금을 울리는 낯익은 곡은 없지만, 독창적인 음악 패턴은 뮤지컬의 또 다른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이야기는 현재에서 출발해 과거로 돌아갔다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는 순환구조로 이뤄졌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즉 ‘현재의 공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이집트관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딸 암네리스가 박물관 내 현재의 시점으로 나와(환생)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설명한다. ‘이것은 한 편의 이야기, 증오의 시대에 태어났던 사랑에 대한, 폭군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연인들에 대한, 나일강변에서 싹텄던, 전쟁이 불 붙여 놓은 운명적 사랑이야기.’암네니스가 부르는 ‘모든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라는 노래의 일부다. 암네니스는 라다메스를 놓고 벌이는 아이다와의 사랑 싸움에서 결국 패자가 되는 인물. 하지만 이 상처받은 인물의 입을 통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말하게 한 것은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그녀를 현재로 끌어와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줌으로써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형 오페라를 현재화할 때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세탁 과정이다. 뮤지컬 아이다는 이런 장치를 통해 비극성을 누그러뜨리며 오페라와 결별한다. 하지만 처절한 사랑 이야기만이 이 작품의 주제는 아니다. 궁극적으로 아이다는 사적인 이해관계와 공적인 이해관계, 개인적 사랑과 국가적 대의 간의 갈등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대중예술인 뮤지컬은 이런 무거운 주제를 가급적 뒤로 밀치고 처절한 로맨스를 도드라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 자고로 지나친 비극성은 뮤지컬 문법의 적이다. 암네리스의 통 큰 배려와 자비로 라다메스와 아이다가 지하 세계에서 사랑을 이루도록 합장되는 것도 비극을 해피엔딩으로 중화시키는 기발한 장치다.음악과 스토리 외에 뮤지컬 아이다의 독창성은 무대미술과 의상, 조명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각종 미국 뮤지컬과 비교해 볼 때 아이다의 세트 디자인과 의상, 조명 디자인은 발군이다. 아니 차원이 다르다. 무대와 조명, 의상은 한마디로 색채 예술의 극치다. 수영장의 유영 장면조차 배경막과 조명을 활용해 실제 구조물을 능가하는 입체감을 드러낸다. 나일강을 떠가는 노예선과 푸른 물결, 암네리스 공주의 왕궁, 누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이집트 무덤의 깊숙한 부분까지 그림과 조명을 활용해 환상적인 무대 메커니즘을 재현한다. 의상의 컬러와 디자인 감각도 탁월하다. 이 때문이 신 감각 뮤지컬이라는 표현이 과장은 아닌 것이다. 8월 27일부터 LG아트센터.©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