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지리산 화엄사
화엄사 찾아 가던 날장마가 시작됐다. 방학이 되어 읽던 책도 놓고 추녀 낙숫물 소리에 마음을 두다가 책장 구석 처박아 놓았던 경허(惺牛鏡虛 1849~1912) 스님의 ‘경허집’을 꺼내 들었다. 무심히 넘기던 책장으로 죽비에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선시(禪詩) 한 수가 스친다. 일 없는 게 일이 되어 빗장 걸고 낮잠을 자네.산새도 나의 고독 아는 듯창 앞 그림자 이리저리 스치네. 無事猶成事 掩關白日眠 幽禽知我獨 影影過窓前 “무사유성사 엄관백일면….” 나직이 소리내 읽어본다. 좋다. 경허 스님은 득도의 경지로 유유자적 읊었지만 내 마음은 속진의 찌든 때와 삿된 욕망으로 가득하여 읽자니 슬며시 부끄러워진다. 내친 김에 마음 털고 산사 바람이나 쐬러 갈까보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구경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득해진다. 그곳을 찾아 가던 날, 지리산 산동마을 노고단 상봉 짙게 드리운 먹구름 사이로 빗줄기 세차게 내린다. 지난 봄에는 지리산 골짜기 구비마다 산 벚꽃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섬진강 강마을마다 매화꽃 지천으로 피더니, 이내 여름이 되어 뱀사골 계곡 물소리 장맛비에 불어 새소리와 다발로 어우러진다. 빗줄기 그친 오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부처님 근엄한 눈빛이 영겁의 세월 속에 빛난다. 화엄사와의 첫 만남내가 화엄사를 처음 찾은 것은 70년대 중반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다. 그 시절 나라가 온통 새마을 운동과 유신으로 바쁘고 힘겨웠지만 대학생활 첫 방학을 맞아 이 좋은 계절 무얼 할까 마냥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으로 생각을 모았다. 등반 차림이라야 청바지에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화를 신은 것이 고작이지만 장발의 앳된 모습은 영화 ‘박하사탕’의 야유회 나온 공장 직원들 모습마냥 설레고 풋풋한 여행이었다. 우리를 실은 용산발 여수행 야간 완행열차는 노량진 철교 지나 멀리 당인리 발전소 불빛 깜박임을 뒤로 하고 남도로 흘러갔다. 콩나물 시루 같은 비좁은 통로에서도 통기타에 맞춰 부른 “자 떠나자-아 동해바다로오-삼등삼등완행열차 기차를 타고오….”송창식의 ‘고래사냥’이 밤하늘의 별똥별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밤 기차는 간이역마다 삶과 환희를 실어내리고 강경, 임실, 남원, 곡성…. 낮선 이름들을 지나 마침내 새벽녘 구례에 도착했다. 지리산 화엄사 이정표가 내걸려 있는 기차역 앞 버스 승강장은 마치 흑백사진처럼 퇴락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정겨웠다. 새벽어둠이 걷히자 눈앞에 펼쳐진 지리산 자락의 그 위용, 그 자태, 정말 멋졌다. 첫 완행버스를 타고 도착한 화엄사에선 시장한 배를 채우는 게 급했다. 계곡물을 받아 등산용 석유버너에서 끓인 소고기라면의 맛이란. 지금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허기를 달래고 나니 산천이 훤히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 숲길 사이 햇살 내리는 계곡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니 작고 아담한 아름다운 일주문 한 채가 눈을 사로잡는다. 지리산 화엄사라고 쓰인 현판, 드디어 왔다. 화엄세계는 깨달음의 세계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 인도 승려 연기(起)가 창건했다. 고대설화에 의하면 연()이라는 상서로운 동물이 있는데 연의 몸통은 거북이 같고 얼굴은 용같이 생겼으며 바다에 살고 거북등에 깃털이 있어 날아다닌다고 한다. 연기 스님은 화엄경을 갖고 이런 연을 타고 날아와 지리산 황전(지금의 화엄사 터)에 와서 모친인 비구니 스님을 모시고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황전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이국의 낯선 스님을 보고 예를 다해 모시고 스님의 가르침도 받았다. 스님은 요사채인 해회당과 의궤를 행할 대적광전을 짓고 도량의 이름을 화엄사라 불렀다. 화엄이란 곧 부처님의 세계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요, 화엄경은 부처님 세계를 일러놓은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화엄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다. 화엄사라는 이름은 연기 스님이 갖고 온 화엄경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곧 화엄사가 중생들을 화엄 세계로 인도하는 곳이며, 현세에서의 부처님 세계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 후 화엄사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 율사가 구층탑을 조성하면서 중창했다. 사리도 봉안됐다. 무열왕 1년(654) 원효 대사가 해회당에서 신라 화랑도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쳐 민족통일의 염원을 내비쳤다. 이어 문무왕 16년(676)에 삼국이 통일되자 의상 대사는 전쟁으로 피폐한 민심을 달래고 불교를 중흥하고자 화엄사를 화엄종의 원찰로 하는 화엄종 십대사찰(화엄십찰)을 만든다. 화엄사는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이자 의상 대사의 손상좌인 연기 조사에 의해 화엄종찰로서의 면모를 비로소 갖춘다. 이때 산중에 화엄원 선림원 등 팔원과 팔십일 암자가 조성됐고 그 중심 본원이 지금의 화엄사인 화엄원이다. 화엄원 안 지금의 각황전 자리에 편마암으로 화엄경 경문을 새기고, 새겨진 석경으로 이층사면칠칸의 전각을 세우니 이름하여 장육전(丈六殿)이라 했다. 연기 조사는 선대 개산조인 연기 스님의 효심을 전해듣고 감동받아 장육전 옆 동백숲 언덕 위 효대(孝臺)에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했다. 사사자삼층석탑은 기본적으로 이중 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 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에 독립된 네 마리의 사자를 각 귀퉁이에 앉히고 그 대각선 중앙에 스님의 모친상을 새겨 탑 기단부 안에 봉안한 특이한 구조다. 사사자삼층석탑 앞에는 길쭉한 네모의 배례석을 놓고 화사석을 받치는 간주석 안에 스님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차를 공양하는 석등을 배치해 후학들에게 불심과 효심의 이정표가 되게 했다. 아직도 각황전 뒤쪽 울창한 동백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국보 35호로 지정된 이 석탑과 석등이 자리해 지리산 산수와 함께 천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화엄사는 통일 신라말 도선 국사가 거주하면서 본전 앞뜰 동서 양쪽으로 오층석탑을 조성하고 사리를 봉안했다. 이후 고려왕조로 넘어와 왕들의 발원으로 계속 번성한다. 숭유억불 정책을 지향하던 조선왕조에도 화엄사는 불사가 이어져 잘 보존돼 왔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팔원팔십일 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왜적을 맞아 화엄사 스님들은 인근의 다른 사찰 스님들과 연합하여 승군을 조직하고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결사 항전했다. 또 화엄사 자운 스님은 의승수군(義僧水軍) 총책으로 연선(船:거북선)의 입안 및 제작을 이순신 장군에게 제안하고 전라 좌수영 군대와 함께 진해 부근 웅천 해전에 참전해 왜군과 맞서 장렬히 싸웠다. 지리산 광양만 섬진강 전투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전사했다. 이후 인조 8년(1630)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 선사가 대웅전 복원을 필두로 여러 전각들을 복원했고, 숙종 25년(1699년) 계파 선사에 의해 장육전 자리에 석경 대신 목조로 건물을 세워 올리니 지금의 각황전이 그것이다.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짜리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에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위엄과 기품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본래 장육전이었던 이 건물은 조선 중기 숙종 25년(1699) 공사를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됐으며, 공사의 마무리와 더불어 숙종으로부터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이로 인해 화엄사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이 됐다. 국보 67호인 각황전 내부는 바깥에서 보이는 중층의 건물과는 달리 툭 터진 통층으로 돼 있다. 내부에 있는 15개의 높은 기둥이 기본 틀을 이루고 여기에 추녀를 지탱하는 활대와 변주가 부가된 구조다. 각황전이 유명한 것은 이러한 건물의 아름다움과 규모 때문이겠지만 전각 사벽면을 ‘해동의 서성’이라 불리는 명필 김생(金生)이 썼다고 전해지는 화엄석경으로 장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고 깨져 산산조각이 나고 현재 1500여점이 남아 대웅전 옆 영전에 보관돼 있다. 노고단 산 줄기 안개에 가려한낮 그렇게도 세차게 몰아치던 장맛비도 오후가 되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대웅전 용마루 너머 노고단 산줄기가 안개에 가려 푸르름을 더한다. 각황전 부처님 앞에 정좌하고 고요히 마음을 모은다. 사람에 밀려, 일에 지쳐 나도 모르게 나이 세월이 벌써 이렇게 들었나… 지난 자취 뒤 돌아볼 겨를 없이 바삐 달려온 내 삶은 얼마만큼 세상 존재 위에 남겨질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하고 다녀갔을까.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선 인연도 생각하면 부처님 옷깃에 스치는 한 줄기 바람인 것을. 시속의 헛된 욕망에서 깨어나 잠시 선객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저녁 예불을 시작하는 쇠 종소리가 청아하지만 왠지 쓸쓸한 여운이 남는다. 인간사 모두 춘몽이지만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내일을 기약하고 새로운 희망을 다짐한다. 선방 스님들의 정진이 견성을 위한 고행의 연속이듯 삶의 노력도 성공을 위한 시련의 연속이다. 물고기 풍경이 뗑그렁 뗑그렁 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