떤 것을 그릴 수 있다고 해서 그리는 행위가 당신을 화가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예술은 당신 머릿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다”라고 조각가 베벌리 페퍼는 말한다. 작품 의도는 작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를 반영하는 것이고, 작품의 표현 방식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늘 창작을 해야 하는 작가에게 있어서 이는 평생의 굴레이자 속박이며 풀어야 할 수수께끼일 것이다. 디지털 영상 작업을 하는 이이남 작가. 그의 작품을 보면 요즘과 같은 영상물 시대에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표현법에 우선 점수를 주게 된다. LCD모니터 안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정선의 ‘인왕제색도’, 모네의 ‘수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동서양의 명화가 담겨 있다. 그의 작품 핵심은 회화, 즉 그려진 채로 고정된 작품을 살아 움직이게 했다는 점이다. 눈이 내리기도 하고, 꽃이 피었다 지기도 하고, 나비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연못 속에 잉어가 유유히 헤엄치기도 하는 등 ‘시간에 따른 동적 움직임’을 통해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풍정과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예컨대 ‘세한도’에서는 인적 드문 마을에 참새가 날아들고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새순이 돋는 이미지 변화를 통해 오랜 귀양살이의 고적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표현한다. 소나무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초가에서 선비가 나와 뒷짐 지고 먼 하늘을 바라보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다소 유머러스함이 묻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의 작품 중 ‘신묵죽도’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이다.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이 첫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내 물 한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리면서 이미지가 점점 선명해지고 대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덧 비가 멈추면 그 사이를 나비가 날고, 대나무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눈이 내려 나무 위에 쌓이고, 눈이 녹는 장면이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이어진다. 그림을 보면서 느낌과 분위기를 상상하는 수고로움 없이 보여 지는 영상에 눈과 마음을 그대로 주시하고 있자면 가슴 뭉클한 감상에 젖게 된다.1969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난 이이남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에서 영상예술학을 전공했다. 딸기 농사를 짓는 농가의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전시회를 다니거나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그저 축축하고 끈기 있는 논흙을 찰흙삼아 조형물을 만들고, 동네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그림 낙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미술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선배들의 그림에 반해 덜커덕 미술반에 들어갔다.“어떻게 저렇게 잘 그릴 수가 있을까 싶었어요. 사물을 똑같이 그려서 마치 실물처럼 보이는 그림이 얼마나 신기하던지요. 그래서 미술반에 들어갔는데 뜻하지 않게 전라도 지역 미술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하고,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시기에 더 열심히 했죠. 자연스레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했는데, 우리 중학교에서 세 명이 지원해서 저만 떨어진 거예요. 데생이나 석고 소묘 같은 입시 미술을 안 배웠으니 당연한 결과였죠. 저희 집이 워낙 시골이라 학원 같은 게 없었거든요.”그 때가 그의 인생에서 최대 방황기였다. 가고 싶은 학교에 떨어지고 나니까 미술에 대한 열의가 사라지고 대충 다니는 식이었다. 그러던 중 고2때 미술 선생님의 소개로 생전 처음 입시 미술 전문 학원에 가게 되었다. 찰흙으로 아그립파를 만들어 보라는 학원 선생님의 주문에 그는 조물조물 만들어냈고, 완성품을 본 선생님의 “어, 너 조각해도 쓰겄다”라는 한 마디로 추호의 의심 없이 조각과를 선택했던 것.대학 때 신현중 교수의 ‘현대미술’ 수업을 수강한 것,그리고 졸업 후 순천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에 강의를 나간 것은 운명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이 두 가지 요소는 미술작가로서 살아가는 그에게 있어 일대 ‘사건’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신현중 교수를 통해 조각 이외의 미술 세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고, 학생들을 가르치러 갔다가 그들을 통해 영상 예술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조각을 전공했기에 처음에는 조각품을 만들어 스톱 모션으로 한 컷 한 컷 촬영한 후 각각의 컷을 이어 붙였다. 이처럼 클레이 애니메이션 방식을 쓰다가 점차 기존의 회화 작품을 활용한 영상으로 옮겨갔다. 명화를 활용한 요즘의 작품이 등장한 것은 2005년. 서울 미디어 시티에서 김홍도와 모네의 그림을 응용한 작품을 선보인 이래 광주비엔날레, 세비야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고 해외 아트페어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추정가를 훌쩍 넘긴 가격에 작품이 낙찰되면서 리틀 옐로칩(Little Yellow Chip,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미술 시장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 반열에 속하는 작가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그의 작품이 들어간 삼성TV가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출시될 예정이다. 일상생활에서 미술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좋지만 사실 예술품의 가치는 희소성에서 말미암는 법. 현대 미술이 점차 대중화되는 경향을 가진다 해도 가전제품에까지 작품이 들어간다면 지나치게 대중화되는 것은 아닐까.“루이비통 가방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경우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의 원작과 달리 가방에 그린 그림은 상품으로서의 작품일 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정판으로서 소장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삼성TV에 제 작품이 들어가면서 대중과 더 가까이 할 수 있고, 그것은 일반TV와는 다른 특별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에디션이 5~6개인 저의 순수 미술 작품은 그것과는 차별화되는 소장가치를 지닐 수 밖에요.”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졸지에 유명 작가’가 되었다거나 ‘벼락 스타 작가’가 되었다고 여길지 모른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묵묵히 작업을 해온 작가로서는 억울한 노릇이다. 이이남 작가는 수 천만 원에 달하는 LCD 모니터 구입비용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기술적 한계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의 작업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요즘이지만 작가는 또 다른 방식의 작업을 구상하느라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새롭게 선보일 그의 작품이 기대된다.디지털 영상작가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