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 산유국이었다면 세계 최고의 유조선을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저가 제품이라는 설움이 없었다면 세계 1등 브랜드가 나올 수 있었을까…”라는 광고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와인이 있다. 주인공은 샤토 질레트. 국내에는 작년에야 겨우 몇 병 들어온 특급 와인이다.이 와인은 만들어진 지 최소 20년이 지나야 비로소 병입된다. 지금 판매되고 있는 이 와인의 최신 빈티지가 1985년이다. 1985년산 이후 와인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와인을 두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샤토가 망해 더 이상 와인을 생산하지 않나 보다’라고 오해하기도 한다.오랜 숙성을 거치는 유명한 와인으로는 스페인 베가 시칠리아의 우니코(Unico: 국내 소매가 80만 원대)가 있다. 이 와인도 최소 10년 이상이다. 몇 년 전 서울의 한 행사장에서 만난 오너 파블로 알바레즈 씨는 늦은 출하 이유에 대해 “고객이 우니코를 오픈했을 때 최고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와인을 구입할 때마다 ‘이 와인이야말로 최고의 맛을 낼 때까지 기다릴 테다’라고 다짐해 보지만 늘 어느 순간 홀라당 마셔 버리고 마는 필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고마운 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옆에 있던 관계자에게 “저분, 재산이 꽤 되나 봐요. 어떻게 10년 이상 돈을 묶어두죠?”라고 묻고 마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참 미안한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10년 이상 장기 숙성을 거치는 와인은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그렇다면 빈티지에 따라 최고 29년이 지난 후(1955년산은 1984년에 출시됐다)에야 나오는 샤토 질레트는 도대체 어떤 와인일까. 혹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메드빌 가문이 보르도에서 와인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은 1700년대다. 그러나 초장기 숙성 와인 제조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암울했던 상황 덕택이다.당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경제 대공황은 보르도 와인 업계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거의 모든 와인이 잘 팔리지 않았던 그때, 달콤한 맛의 소테른 와인들은 그야말로 철퇴를 맞았다.2004년부터 샤토 질레트의 양조 및 경영까지 맡고 있는 줄리(Julie Gonet-Medeville)의 할아버지, 르네 메드빌(Rene Medevi lle)에게는 당시 1대의 압착기와 중고 오크통 몇 개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새 오크통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기만을 기원하는 것 외에는 달리 취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용도 저렴하게 들면서 오크통에 비해 천천히 숙성되는 시멘트 통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와인을 넣고 묵묵히 시간을 견뎌냈다. 이후 4~5년이 지날 즈음 그는 와인을 맛본다. 맛도 향도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천천히 숙성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후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전장으로 떠나야 했다. 그는 부인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와인을 넣어둔 탱크를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말이다.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서둘러 와인부터 확인했다. 풍부한 과일의 맛과 향, 한편으로는 숙성의 풍미까지 훌륭하게 표현해 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이 시멘트 탱크에서의 장기 숙성은 샤토 질레트만의 제조법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오랜 숙성이 끝나면 드디어 병에 담기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다시 3~5년간 병속에서의 숙성이 기다리고 있다(1986년산이 2007년에서야 병입됐다. 작년부터 병입된 와인은 1988년산이다).샤토 질레트는 소테른 크뤼 리스트에는 이름이 없다. 그러나 전 세계 최고로 뽑히는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에는 늘 샤토 디켐과 함께 나란히 올라와 있다. 디켐의 연간 생산량 10만 병에 비하면 샤토 질레트의 생산량은 6000~7000병으로 너무나 미미하다.글 김혜주 와인 칼럼리스트·사진 알덴테북스 ‘전설의 100대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