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의 현대적 재해석 동양화가 김선두
았죠. 신선했죠. 못된 부모 만나 매일 인스턴트 음식만 먹다가 김치 맛을 보았을 때의 개운함이랄까요?” 김선두 작가는 자신을 한국 화가로 이끌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를 사로잡은 느낌은 난을 치듯 쳐올리는 운필의 감이었을까, 아니면 화선지에 번져나가는 필묵의 매혹이었을까. 이유야 어떻든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한국화의 맥을 잇는 중심에 김선두라는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다. 최근 들어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덕에 동양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실상 우리 그림이나 조선 시대 화가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에 따라 우리의 미감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만난 김선두 작가.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은 조선시대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원 장승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취화선’이다. 극중 장승업의 작품을 그려낸 것도, 스크린 속에서 일필휘지하는 손 연기를 한 것도 그였다.그러나 전시장과 작업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그의 작품은 먹의 농담을 살려 표현한 전통화와는 일견 거리가 있어 보인다. 파스텔 톤의 색감과 화면의 형식은 오원 장승업은 물론 단원, 혜원, 겸재의 작품에서 연상되는 수묵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수묵을 하든, 채색을 하든, 입체 작업을 하든, 영상 작업을 하든 이 땅에서 그려지는 것은 모두 한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면에 내재된 수묵화의 정신이 어쩌고 하면서 언급하면 무척 공허하게 들리고, 선 위주의 표현 형식은 서양화에서 보면 드로잉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죠. 동양화의 원류로서 수묵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려 나가면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적이고 서양미술과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채색화로만 보이는 제 그림 속에 들어간 선은 굉장히 중요한 한국적 정신 요소죠. 전통과 현대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세대를 거쳐 전승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장욱진 등 근현대에 걸친 화가들의 작품을 보아도 결국 그림 속에서 이 두 가지 요소를 작가 나름대로 풀어냈을 때 지속적인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춘향가를 보면 이몽룡이 성춘향을 향해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라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혜곡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의 말처럼 한국 사람은 손으로 쓰다듬고 가까이서 돋보기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느긋이 물러서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춰 왔다고 할 수 있다. 김선두 작가의 작품도 한 걸음 물러서 차분히 바라보면 한국적 미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표현 기법이 그러하다. 전통 회화 기법 중 하나인 장지 기법은 동양화 분채에 안료를 섞어 만든 색을 맹물에 가까울 정도로 엷게 해서 수십 번 덧바르는 것이다. 이렇게 쌓아올린 색은 여러 번 덧발라 표현한 유화의 마티에르와는 전혀 다르다. 흐리게 반복적으로 칠해서 맑고 투명하며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그가 늘 경계하는 것은 ‘자기 복제’다. 고향 선배이자 본받고 싶은 예술가로 꼽는 소설가 이청준이 언젠가 글을 쓸 때 항상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임한다는 말에 자신도 그런 마음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본질은 변함이 없되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먹은 검정색의 단일색이 아니라 적·청·황·흑·백, 즉 오방색의 오채(五彩)가 있는데 수묵화는 농담을 살려 다섯 가지의 먹색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조들이 색 자체를 농담 속에 함축했듯 한 발 더 나아가 함축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라는 자문에 콜라주, 조각 등으로 먹 선만 살려 농담을 표현하는 시도로 자답해 가며 늘 새로움을 추구한다.“정신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합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주제는 비슷합니다.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가 바로 예술이죠. 대학 시절 단색 회화가 유행하면서 스토리적인 요소를 빼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남도 지방의 창과 맞닿아 있는 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길은 그 자체가 이야기이자 노래이고, 노래에 가사가 더해지면서 구체성을 띠고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주거든요.”도시 서민들을 묘사한 인물화로 시작한 초기작 이후 남도를 푸근하게 표현한 ‘남도’ 연작, 이름 모를 들풀을 그린 ‘그리운 잡풀들’ 연작, 먹이 스민 종이를 오려내고 뒷면에 장지를 붙인 콜라주 기법의 ‘행’ 연작에 이어 고향인 장흥의 산천을 소재로 한 ‘느린 풍경’ 시리즈는 현대의 진경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이면에는 실존주의적 물음을 품은 작품이기도 하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처럼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도 ‘어’ 하는 순간 시간이 성큼 지나고 말 것이다. 유유자적한 삶과 그런 세계를 동경해 표현한 것이 바로 ‘느린 풍경’ 연작이다.‘현대 도시의 관계적 삶이 직선이라면 존재적 삶은 곡선이다. 직선이 빠름과 능률을 추구하는 선이라면 곡선은 느림과 여유, 그리고 살가움을 지향하는 선이다. 곡선은 느리다. 느린 선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삶의 넉넉한 여백이 있다. 쫓기듯 사는 삶에는 여유가 없다. 바쁘다는 것은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여유가 있을 때 느릴 수 있다.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야 보다 밀도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다. 밀도 있는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전시 서문의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밝혔듯 그의 화면을 가로지르는 곡선들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근작인 ‘싱그러운 폭죽’ 연작 또한 삶의 절정이나 깨달음을 함축한다.“할미꽃이라고 하면 땅을 향해 굽은 꽃대 때문인지 기운 없고 무기력한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이청준 선생님과 함께 고향의 산천을 둘러보던 중 할미꽃 군락지에서 ‘청소년 할미꽃’을 본 겁니다. 굉장히 대차고 힘 있게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모든 꽃은 폭죽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화약 냄새나는 인위적 폭죽이 아닌, 싱그러운 꽃은 자연이 쏘아올린 폭죽과 다름 아니더군요. 개화하는 순간은 절정의 순간이자 깨달음의 순간이고 사랑이고 삶의 절정일 수도 있고…. 그렇게 피고나면 허무함이 밀려오지만 꽃이 지는 것을 나쁘게 볼 것도 없죠. 그래야 그 다음에 열매를 맺게 되는 거고 그게 곧 삶 아니겠어요.”한국화의 감상법을 묻는 질문에 그는 편하게 ‘그냥’ 보라고 말한다. 의미를 찾는 시각에서 봐도 좋고, 이념적인 관점에서 따져 봐도 좋고, 수묵화인지 채색화인지 구분하며 재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무방하다. 함축 문학인 시를 읽듯, 수수께끼를 풀듯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작가가 숨겨 놓은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 바로 그림 감상의 묘미인 것이다. 기어이 꼽는다면 직접 배워 그려볼 것을 권한다. 축구를 해 본 사람은 골을 넣었을 때의 쾌감, 실수했을 때의 ‘어이쿠’ 하는 느낌을 알기 때문에 온몸으로 느끼며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취미로 해 보는 것이 예술을 감상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1‘느린 풍경 - 움트다’, 350×140cm, 장지 위에 분채, 2008년 작. 2‘느린 풍경 -달 긷는 집’, 144×100cm, 장지 위에 분채, 2008년 작.3‘느린 풍경 - 해변의 노래 장이’, 98.5×58.5cm, 장지 위에 분채, 2008년 작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