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문 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조병문 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상무)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5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클래식 스피커들과 LP음반용 턴테이블이 눈길을 끈다. 조 상무는 학창 시절부터 하나씩 사 모은 오리지널 LP판이 2000장에 달하는 재즈 마니아다. LP판 하나하나마다 추억이 스며 있다. 클래식 스피커에 심취한 뒤 아내 몰래 구입한 스피커만도 수십 개에 달한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스피커가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최신 제품보다 음질이 낫다”는 그의 클래식 스피커에 대한 평가는 최첨단 금융 상품에 대한 맹신과 추종이 빚은 세계적 금융 위기 앞에서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국제 금융시장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해진 요즘 사무실에서 음악을 듣는 횟수가 늘었다는 조 상무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판단이 쉽지 않을 때면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말했다.국내 최장수 금융 담당 애널리스트이자 첫 금융섹터 출신 리서치센터장인 조 상무에게도 최근 전개되고 있는 동시다발적 금융 위기는 초유의 사태다. 15년 경력의 금융 담당 애널리스트로서 고민이 누구보다 깊을 수밖에 없다. 조 상무는 “위기 타개를 위해 세계 각국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전개한 금리 인하의 효과가 확인되는 내년 2분기가 경기 침체의 깊이를 가늠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금리 효과가 힘을 쓰지 못할 경우 장기 침체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현 위기의 출발점이 주택 가격 급락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국내도 향후 주택 시장 움직임과 건설사들의 유동성 경색 해소 여부가 경기 방향성을 결정하는 핵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단기적으로 3개월 리보(LIBOR) 하락 여부, 중·장기적으로는 미국 투자은행의 손익 추이와 미국 은행들의 파산율로 보고 있다. 현 상황은 유동성이 돌지 않는 신용 경색 상황이라 3개월 LIBOR 하락 반전은 이 같은 위기 해소의 주요 지표다. 미국 투자은행의 대손상각 감소 여부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미국 은행들의 파산율 정점 시점도 관건인데 과거 통계로 보면 공격적 금리 인하 효과가 가시화되는 6개월 뒤다. 10월부터 강력한 금리 인하가 시작됐으니 내년 2분기가 중요한 시점이다. 만약 해결 시그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1970년대 오일 쇼크나 1930년대 대공황처럼 상상하기 힘든 침체에 직면할 수 있다.”“추가 부실과 그에 따른 상각 및 자본 확충이 불가피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정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관련 부실 규모가 8000억 달러인데 그간 전 세계 금융회사의 상각 규모가 6500억 달러 규모다. 따라서 1500억 달러가량의 추가 상각이 예상되는데 미국 주택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 상각 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미국 금융 위기의 승부처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였다. 리먼을 파산으로 몰고 간 것은 미국 정부의 패착이었다고 본다. 이로 인해 2000억 달러면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위기가 7500달러의 추가 지원 외에도 자금을 계속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앞으로는 미국 정부가 대형사의 추가 파산을 방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1980년대 금융 위기 당시 구조조정 기관인 정리신탁공사(RTC) 설립 이후 파산하는 은행이 늘었는데 대부분 중소 금융회사였다. 금융권에 대한 미국의 구제금융은 회생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 집중될 것이고 따라서 경쟁력 없는 지방은행이나 뮤츄얼 펀드 헤지 펀드는 파산할 것이다. 당분간 파산하는 은행 수는 증가 추이를 보이겠지만 대형 투자은행이나 상업은행의 파산은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대출을 통한 과도한 덩치 불리기와 과거 행태를 탈피하지 못한 영업 관행이 부른 화다. 올 상반기까지 은행권의 외화 부채와 은행채는 각각 80조 원, 30조 원이 늘었다. 지난해 종합자산관리계좌(CMA)로 인해 은행에서 증권으로의 머니 무브먼트로 30조 원이 빠져나갔는데 이를 은행채 발행으로 채웠다. 또 대출 경쟁 와중에 예금을 통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80조 원을 해외에서 단기로 조달했다. 문제는 금리가 싼 3개월짜리를 빌려 가계나 기업에는 2∼3년짜리 장기로 빌려줬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당시 장·단기 자금 운용 미스 매칭의 위험성을 경험하고도 눈앞의 이자 비용 때문에 단기 자금을 쓴 것이다. 결국 올 하반기 신용 경색이 갑작스럽게 발생하자 직격탄을 맞게 됐다.”“과거 유동성 과잉 공급이 중국 주식을 비롯해 원자재 부동산 등 비화폐 시장을 비이성적 규모로 팽창시킨 게 사실이다. 유동성은 풀기는 쉽지만 거둬들이기는 힘든 속성을 갖고 있다. 현재 국내 금융 위기도 유동성 부족보다는 자금이 돌지 않는 원인이 더 크다. 통화 속도가 사실상 제로에 수렴된 상태다. 이 때문에 유동성 추가 공급을 통한 위기 해소에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현 위기는 독(통화 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을 독으로밖에 치유할 수 없는 응급 상황이다. 따라서 유동성 공급과 함께 정부 통제 하에 구조조정이 적극 진행될 필요가 있다. 자연발생적 부도는 시장 공포감 확산으로 연쇄 부도를 가져올 수 있지만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은 불확실성 제거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호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국내 금융 위기는 상당 부분 주택 경기 침체에 따른 유동성 문제에서 비롯됐다. 20만 가구의 미분양 아파트는 가구당 평균 3억 원으로 추산하면 60조 원이 묶여 있는 셈이다. 1년 이자만 5조 원에 달한다. 정부 주도의 미분양 펀드 등을 조성해 미분양 해소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정책이 필요하다.”“은행의 PF 연체율은 3분기 말 현재 0.73%로 아직 관리 가능한 범위에 있다. 올 여름부터 일각에서 저축은행의 연체율이 16%에 달한다며 전체 금융권의 PF 리스크를 과장한 측면이 있는데 저축은행의 연체율은 지난해에도 12%에 달했다. 스스로 위기를 부풀리면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다.”“IB를 지향해 온 세계적 금융회사가 사실상 다 망한 셈인데 이는 모델이 잘못된 게 아니라 리스크 관리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극단적 이익을 추구하는 IB 속성만 앞세웠을 뿐 리스크 관리가 뒤따르지 못했다. 자산담보부증권(CDO), 크레디트 디폴트 스와프(CDS) 등 신종 파생상품에 대한 정부 당국의 감독 기능도 따라가지 못했다.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계기로 IB 영업을 준비하는 국내 금융회사에는 고수익과 리스크 관리가 병행되는 새로운 모델을 발굴해야 하는 과제가 떨어진 셈이다.”“금융주의 리스크는 크게 외화 유동성, 원화 신용 경색, 펀더멘털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 협정으로 외화 유동성 리스크는 상당 부분 해소됐다고 본다. 통화 스와프 발표 전 은행주의 주가순자산배율(PBR)은 0.3배로 외환위기의 0.2∼0.3배에 근접했다. 시장에서 사실상 파산으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달러 스와프 결정 이후 반등, 현재는 0.4배 안팎이다. 향후 반등 여부는 두 번째 위기인 원화 신용 경색 완화 여부다.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효과를 발휘할 경우 코스피지수 1500선에서 PBR 0.5∼1.0배까지 반등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대내외 변수가 단순한 하나금융지주와 가계 금융 비중이 높은 KB금융지주가 유망하며 경기 반등 시에는 주가 상승 여력이 높은 기업은행, 우리은행의 상승 탄력이 높다고 본다. 다만 변동성이 심한만큼 내년 상반기까지는 주식보다 채권 위주의 투자 전략이 바람직하다.”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연세대(대학원)-경제학대신·교보·현대·LG투자증권 금융애널리스트글 김형호·사진 이승재 기자 chsan@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