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공기와 울창한 숲, 그리고 온천수 체코의 휴양 도시 카를로비 바리

럽 한복판에, 그것도 수세기에 걸친 역사를 지닌 대규모의 온천 휴양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온천은 세계 각지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시설이지만 수중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온천탕 속에 삼삼오오 앉아 미소 짓는 ‘파란 눈의 유럽인’들의 모습이 언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온천을 즐길까. 그곳 온천의 효능은 우리의 온천과 어떻게 다를까. 백문이 불여일견,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유럽 최고의 온천지로 알려진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로 떠났다. 오랫동안 지켜 내려온 그들만의 휴식법에 담긴 비밀을 엿보고, 덤으로 만성피로에 시달리던 몸도 추스른 유럽 온천 체험기.오전 9시, 프라하 시내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초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할 뿐 더없이 좋은 날씨에 기분이 상쾌해져 벌써부터 마음속에 잔뜩 ‘바람’이 든다. 어느새 도심을 벗어난 차창 밖으로 넓은 목초지와 야트막한 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더니 체코의 푸근한 시골 풍경들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힘찬 엔진 소리에 눈을 돌려보니 빨강, 노랑, 검정 등 색색의 오픈카 수 십여 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로 위를 시원스럽게 질주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환상적인 날씨에 체코의 오픈카 동호회가 ‘라이딩 번개’라도 벌인 것인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하나같이 들뜬 표정으로 드라이빙을 즐기는 사람들. 그렇게 다채로운 풍경에 일상의 권태에 찌든 눈을 씻어내며 곧 만나게 될 그곳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두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카를로비 바리. 짙푸른 초록과 알록달록 만발한 꽃들이 입구에서부터 여행자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휴양지이자 최대의 용출량을 자랑하는 카를로비 바리의 역사는 유럽 온천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세기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4세가 사냥 도중 우연히 이곳에서 온천을 발견한 이후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유럽에 온천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6세기 전후의 일이니 카를로비 바리는 유럽 온천 문화의 발원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셈. 프라하 못지않은 인기를 끄는 관광지이기 때문에 특별히 온천 휴양을 즐기려는 사람들 외에도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많아 언제나 붐비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한적함 속에 조용히 쉬고 싶은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온천도 하고 아기자기한 재밋거리를 만끽해 보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일 것이다.이곳의 온천은 탄산과 미네랄, 알칼리 성분이 풍부해 위장 장애와 소화기 계통 질환에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괴테나 베토벤, 브람스 등 유명 인사들이 요양을 위해 자주 찾았다는 것 또한 특기할만한 사실. 이 때문에 카를로비 바리에 왔다면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우선 온천수를 맛볼 일이다. 이곳 마을에는 곳곳에 365일 언제나 온천수가 졸졸 흘러나오는 광천지가 12곳 자리하고 있는데 이 광천지를 하나씩 차례로 돌며 물을 받아 마시는 것이 이곳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필수 코스다. 온천수는 미지근하면서도 약간 짭짤하고 철분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오묘한 맛이어서 처음 마실 때는 다소 거부감이 있지만 익숙해지면 자꾸만 당기는 것이 묘한 중독성을 지녔다. 온천수의 온도는 섭씨 30~70도로 꽤 뜨거운 편이다. 마을 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수온이 점점 뜨거워지며 수온에 따라 물맛도 제각기 다르다.여행자들은 저마다 컵을 하나씩 손에 들고 온천지를 돌며 물을 받아 마시는데, 독특한 컵 모양 또한 볼거리다. 마을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이 컵은 온천수를 따라 마시는 전용 도자기 컵이다.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컵 손잡이에 재미있는 비밀이 숨겨 있다. 손잡이 윗부분에서 컵 바닥까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 끝에 입을 대고 컵에 담긴 온천수를 빨대처럼 마시는 것.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길을 걸으며 온천수를 쪽쪽 빨아 마시는 모습이 이채롭다. 물론 미리 준비한 다른 컵에 온천수를 따라마셔도 되지만 전용 컵을 사서 ‘기분 내며’ 마셔 보면 두고두고 잊지 못할 재미를 챙길 수 있다. 컵의 모양도 재미있지만 뜨거운 온천수가 도자기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식어서 마시기 편하게 한 것이라니 과학적인 원리도 숨어 있다. 컵의 가격은 150~200코루나(약 1만~1만3800원) 정도이며 물을 마신 후 기념품으로 소장하기에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여행자들 틈에 섞여 온천수를 홀짝이며 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봤다. 산으로 둘러싸인 언덕 곳곳에 온천 호텔들과 요양원이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우아한 자태로 우거진 가로수와 멀리서 들려오는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한가로운 산책에 운치를 더한다. 초록색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한가득 마시며 걷다 보니 세상 모든 근심과 피로가 산 너머로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의 온천 휴식에 담긴 특별함은 이런 입체적인 휴식 방법에 있음을 그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우리의 온천 휴양과는 달리 맑은 공기와 울창한 숲에서 마음을 씻고 온천수를 마시고 몸을 담그며 몸 안팎의 건강을 다스리면서 깊이 쉬어가는 그들의 휴식법.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런 여유를 누린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이 마을은 말없이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온천수를 맛보며 속을 다스렸으니 이번에는 피부에 좋다는 미네랄 온천수에 몸을 담가볼 차례다. 강변에 늘어선 상점들을 따라 올라가다가 발길을 멈춘 곳은 로마의 고대 유적지를 연상하게 하는 겉모습의 캐슬 스파. 카를로비 바리의 온천 타운에 자리한 고급 스파들 중에서도 특히 시설이 좋기로 유명한 이곳은 체질에 맞게 선택해 즐길 수 있는 테라피 메뉴를 25가지나 갖추고 있어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곳이라고 한다. 로비의 리셉션 데스크 옆 벽면을 가득 채운, 세계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보니 왠지 제대로 골라서 찾아온 것 같아 괜스레 기분마저 우쭐해지는 듯하다.메뉴 중 미네랄 광천수 테라피를 선택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개인 테라피실로 들어섰다. 9㎡ 정도 되는 아담한 공간에 작은 침대와 1인용 욕조가 놓인 것이 전부다. 생각보다 수수하고 평범하게 꾸며져 있었다. 뭔가 대단한 시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지만 오로지 온천수질로만 승부한다는 인상에 그 효능을 은근히 기대하게 만든다. 옷을 벗은 후 탄산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욕조에 곧바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물의 온도는 온천치고는 약간 찬 느낌이 나는데 광천수는 너무 데우면 탄산 성분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적당히 기분 좋을 정도로 미지근하게 맞춘 것이라고. 물에 몸을 담근 순간부터 온몸에 엄청난 양의 탄산 기포가 달라붙어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피부에 파스를 붙인 것처럼 화끈거리는데 아프지는 않다. 한국에서도 광천수 온천욕은 몇 번 해봤지만 이렇게 많은 탄산 기포가 달라붙는 경험은 처음이다. 약 20분 후 탕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피부가 약간 따갑다는 것 외에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데 스파에서 나와 호텔로 향할 때부터 조금씩 몸의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잔뜩 뭉쳐 있었던 어깨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잔뜩 부어 있던 다리의 부기와 근육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겨우 20분 동안 몸을 담근 것뿐인데 이토록 몸이 가벼워질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미네랄 온천욕은 한 번만 해도 꽤 효과를 본다는 말을 듣긴 하지만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체험해 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최소 2주 정도 호텔에 머무르며 온천 휴양을 즐긴다는데 2주는 고사하고 며칠이라도 더 머무르며 쌓인 피로를 완전히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장래에 시간을 내 꼭 다시 와서 오래도록 푹 쉬기로 마음먹으며 나 자신과 ‘타협’을 한 뒤에야 겨우 발을 돌릴 수 있었다.건강 마을을 대표하는 명물이 술이라니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성분과 효능을 알고 나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체코 특산물이기도 한 베헤로브카는 30여 가지 허브 추출액을 넣은 약용 술이다. 각종 위장 질환에 좋고 소화가 되지 않을 때 마셔도 효과가 있다. 쌉싸래하면서도 뒷맛이 달콤해 주로 식전주로 마신다. 알코올 도수가 38도로 꽤 높은 편이므로 홀짝홀짝 마시다간 취할 수도 있다. 크기별로 가격이 다양한데 150코루나(약 9900원) 정도면 작은 병을 살 수 있다.여행 정보● 시차 : 한국보다 8시간 늦다● 환율 : 1코루나(CZK)는 약 66원(2008년 11월 10일 현재)● 물가 수준 : 최근 들어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유럽의 인근 국가들에 비하면 아직은 저렴한 편이다. 생수 한 병에 약 40코루나, 생맥주 한 잔에 약 30코루나, 레스토랑 스파게티 한 접시에 약 80코루나.● 항공 : 체코항공과 대한항공이 공동으로 서울에서 프라하를 직항으로 연결한다. 월·목·토요일에 출발, 도착하며 비행시간은 약 11시간 30분. 문의 체코항공 (02)775-3557● 프라하에서 카를로비 바리 들어가는 법 : 프라하 시내의 플로렌스 버스터미널에서 시간마다 운행하는 직행버스를 타고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요금은 편도 129코루나.글·사진 백선영 월간 비틀맵트래블 기자취재협조 체코관광청(02-776-9837)